인고의 시간을 관통한 배첩의 길

문화재가 가지는 고유의 가치를 찾아가다 보면 의외의 것에 닿게 될 때가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완 성된 작품이지만 그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것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뒤에서 자리를 지키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의 아름다움을 밝혀주는 것들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또한 큰 힘을 발휘한다. 배첩(褙貼)은 바로 이러한 은근한 미학을 담은 우리 전통의 귀중한 자산이다. 글씨나 그림에 종이·비단 등을 붙여 족자·액자·병풍 등을 만들어서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기법을 가리키는 배첩. 전통공예기술의 하나인 배첩은 총 다섯 가지로 제작되는데 액자, 병풍, 족자, 장정과 고서화(古書畵)처리로 구분된다. 흔히 우리가 ‘표구(表具)’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배첩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 정도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분명 배첩은 나름의 예술적 영역을 가진 전통공예로 독특한 가치와 고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배첩 자체가 가진 미학이 다른 여러 작품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빛나게 하며 가치 를 배가시켜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뒤에서 드러나지 않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기에 배첩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다.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우리네 전통문화이기에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배첩처럼 묵묵히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시도무형문화재 제7호 배첩장 기능보유자인 홍종진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15세 어린 나이에 농사짓기 싫어 청주의 한 표구사로 일을 하러 오면서 우연처럼 숙명처럼 시작된 배첩과의 인연은 오늘의 홍종진 선생을 있게 했다.

“처음에는 배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작했습니다. 기술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바로 기술을 전수받은 것도 아니고 5년 정도는 풀을 쑤고 칼을 가는 등 정말 소소한 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스승께서 작업하시는 모습을 눈으로만 익혔죠. 의뢰받은 작품에 손도 대어보지 못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버려지는 종이들을 모아다가 일과 후에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그 후 10년이라는 사사의 시간을 통해 비로소 배첩을 알아갔죠. 실력을 쌓고 배첩을 이해하고 기술을 터득하는 동안 정말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길고 지난한 배움의 시간을 이끌어준 스승이 바로 지금은 작고하신 배첩장 김표영 선생(국가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 기능보유자)과 그의 스승이신 윤병세 선생이었다. 긴 시간 홍종진 선생의 뒤에서 두 분의 장인이 끊임없이 가르침을 전하며 배첩의 모든 것을 익히고 배첩만의 매력을 살려낼 수 있는 기술과 가치를 깨우치게 이끌어준 것이다. 덕분에 홍종진 선생은 배첩의 명맥을 이어가는 장인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수백 년의 시간을 담는 혼신의 작업

홍종진 선생이 작업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배첩 전수교육관 마당에는 수십 개의 장독이 줄지어 서 있 다. 이 장독의 용도는 특별하다. 바로 배첩 작업에 사용하는 풀을 만드는 것이다. 배첩은 재단, 초배, 겹배, 건조, 삼배, 축목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데 이 과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붙임에 사용되는 풀이다. 그래서 홍종진 선생은 모든 풀을 직접 제조해서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지킨다. 풀을 만드는 데만 해도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정도로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을 쏟아야 하는 작업으로 유해한 성분은 모두 걸러내고 벌레가 끓지 않도록 약초물을 혼합해서 제조한다.

“배첩에서 풀은 절대적인 재료입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직접 밀가루를 빻고 침전시키는 시간을 거쳐 다시 약초를 넣어 침전을 시키죠. 그런 다음 남은 분말만 말려서 필요한 양만큼 풀을 쑤어서 사용합니다. 이런 풀은 썩지 않고 종이든 비단이든 배첩의 다른 재료들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매년 밀가루 400kg 정도를 풀로 만드는데 이것을 발효시키면 150kg 정도가 됩니다. 풀을 쑤는 것에서부터 인고의 작업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기술이 발전해도 이런 과정은 따를 수가 없다는 생각을 작업을 하면서 많이 하게 됩니다.”

재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홍종진 선생은 아무리 솜씨가 탁월해도 재료가 좋지 않으면 오래가지 않기에 사람의 기술은 그 다음이라고 말한다. 수백 년 동안 유지되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문화재의 가치를 획득하는 길이라는 홍종진 선생은 그렇게 배첩한 작품은 400년도 거뜬히 견딜 수 있어 후세에도 그 작품을 전하며 감동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작업, 배첩장인으로서 문화재를 전수하는 것이 앞에서 빛나지는 않지만 뒤에서 은근한 빛을 발하는 역할이라 더욱 중요하다는 홍종진 선생. 그 자부심으로 선생이 지금까지 복원한 문화재는 1,000건이 넘는데 박물관, 미술관, 절 등 곳곳에 선생의 손을 거친 작품이 보관되어 있다. 세월을 견디며 대대손손 훌륭한 문화재를 감상하고 귀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배첩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홍종진 선생의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다시금 엿볼 수 있다.

글. 김영임 사진. 이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