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한국초상화 읽기-48]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한 왜군은 20여 일 만인 5월 3일 한양에 무혈로 입성했다. 왜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달아났던 선조는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 즈음 명나라는 대군을 보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다. 명은 조선을 구하기 위해 막대한 물량을 쏟아부었다. 군사 21만명을 동원했고 군량 등 전비로 쓴 은(銀) 역시 883만냥이 넘었다. 명나라 원병이 없었다면 조선반도 전체가 왜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최고 영웅은 이순신(李舜臣)을 꼽는다. 수로를 통한 보급을 차단해 평양성의 왜군이 선조가 머물던 의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을 극복하는 데 실질적인 최대 공로자는 석성(石星)이라는 중국인이다.
▲ 명나라 파병을 이끌어낸 석성 초상화 초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년)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임진왜란의 최대 공로자는 석성이며 이순신은 그다음이고 이여송(李如松)과 심유경(沈惟敬)이 또 그다음"이라고 썼다.
당시 중국 조정에는 처음부터 "외번(外藩·국경 밖의 속지)을 위해 재력을 쏟아부을 수 없다. 조선을 둘로 나누고 적을 막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맡기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파병 불가의 목소리가 비등했다. 이미 왜병이 점령한 곳은 포기하고 적임자를 골라 남은 지역을 잘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게 명나라의 기본 방침이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오랑캐의 싸움에 대국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원칙도 있었다. 일각에서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런데 명나라 군권을 쥐고 있던 병부상서(병조판서)였던 석성이 "조선이 왜군에 점령되면 왜군은 곧바로 베이징으로 쳐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황제를 설득했고 황제는 결국 대규모 원병을 받아들이게 된다. 왜와의 평화교섭을 주도했던 명나라 사신 심유경을 추천한 사람도 바로 석성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것은 사실상 그인 셈이다.
석성은 상하이 출신으로 1567년 즉위한 명나라 목종이 주색잡기에 빠져 정무를 게을리하자 이를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됐다. 1573년 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공부상서, 호부상서 등 요직을 섭렵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그는 명 정부와 조선 정부는 서로 순치(唇齒)의 관계임을 내세워 조선 파병을 성사시킨다.
석성은 출생이나 경력 등을 볼 때 우리와 연관될 일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이유로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것일까.
홍순언(1530~1598년)과의 인연이 그 배경에 있다. 홍순언은 조선의 통역관으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해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당시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명나라의 국가 공식 기록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돼 있어 논란이 생겼다. 이를 바로 잡아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종계변무였으며 조선왕실의 오랜 숙원이었던 이 문제를 처리한 사람이 바로 홍순언이다.
젊은 시절 홍순언은 통역을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한 술집을 찾았다. 미모의 여자를 보고 주인에게 불러 달라고 했는데 이 여인은 난데없이 소복을 입고 들어왔다. 홍순언은 연유를 물었고 여인은 "저희 아버지는 원래 저장 출신으로 이곳에서 벼슬을 했지만 질병을 얻어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고향에다 장사를 지내고 싶지만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부득이 몸을 팔아 장례비를 대려고 합니다"고 하소연했다.
여인은 삼백금이 필요하다고 했고 의기가 충만했던 홍순언은 곧장 전대를 풀어 돈을 건넸다. 기대치도 못한 일에 깜짝 놀란 여인이 "함자라도 알게 해달라"고 간청하는데도 기어코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다가 성만 가르쳐 주고 술집을 나왔다. 이를 두고 동행했던 이들은 바보라고 웃었다고 한다.
이 여인이 후일 예부시랑 석성의 후실이 된 류씨 부인이다. 부인은 홍 역관의 은혜를 잊지 못했으며 남편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석성은 이후로 조선의 사신을 볼 때마다 홍 역관이 함께 따라왔는지 묻곤 했다. 그들의 감격스런 첫 만남이 외교 자료를 정리한 통문관지(通文館志)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1584년(선조 17) 종계변무사 황정욱(黃廷彧)을 수행해 홍순언이 중국땅을 밟았다. 사신단이 베이징에 이르러 조양문 밖에 당도하니 비단장막이 처져 있고 기병이 달려와 "예부시랑이 부인과 함께 맞으려고 기다린다"는 전갈을 알려왔다. 예부시랑은 장막 안에서 홍순언을 맞아 "그대는 베이징의 술집에서 있은 일을 기억하는가. 내 부인의 얘기를 들으니 그대는 진정 천하의 의사"라고 감사를 표했다. 절을 하는 부인을 홍순언이 만류하자 석성은 은혜에 보답하는 절이니 받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고 두 사람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류씨는 또 '보은(報恩)'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비단 수십 필을 선사했으며 남편에게 얘기해 종계변무를 종결짓도록 했다. 부인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지원군을 조선에 파견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화의가 진행되면서 철병했던 왜가 1598년 협약을 어긴 채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강화 실패, 막대한 군비 조달 등의 책임을 물어 석성의 관직을 박탈했고 1599년 그는 결국 옥중에서 병사한다. 류씨 부인 등 그 가족들은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 과정에서 석성은 조선에 구명(救命) 외교를 벌여 줄 것을 간청했으나 외면당한다. 선조는 대신들과 몇 차례 논의한 끝에 명의 조정이 결정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해 끝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석성의 차남인 석재금(石在錦)이 식솔들을 이끌고 조선에 망명했다. 이들은 중국의 본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본관을 조주석씨(潮州石氏)라 했으며 석성을 시조로 삼았다.
선조는 석성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그에 대한 제사와 신원(伸寃) 문제는 후대에 끊임없이 논의된다. 정조는 "석 상서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갚지 못했다"며 "그의 죽음은 곧 우리 때문"이라고 한탄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중국인 중에서는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서 명나라 부대를 지휘한 이여송 장군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있다. 석성과 달리 나쁜 이미지가 강하다.
▲ 명나라 파병군을 지휘한 이여송 초상화. 일본 텐리대 소장.
조선 출신인 이영(李英)의 후손으로 집안은 요동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부친의 벼슬을 물려받아 지휘사가 됐다. 황제의 명에 따라 명군 4만3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이여송은 우리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로는 기세가 꺾여 싸움을 기피하고 교섭에만 일관해 비난을 샀다. 명나라 군대는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약탈, 강간, 폭행 등 각종 범죄를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높았다. '청구야담(靑丘野談)' '계서야담(溪西野談)' '임진록(壬辰錄)' 등에서는 이여송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설화가 여럿 전해 온다.
명나라로 귀국한 뒤에 이여송은 요동총병이 됐으며 1598년 타타르가 요동을 침공하자 경기병(輕騎兵) 4000여 명을 이끌고 방어에 나섰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했다.
이여송의 후손 역시 우리 땅에서 살고 있다.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따르면 이여송의 손자 이응인(李應仁)이 명과 청이 교체되는 시기에 난리를 피해 조선에 망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여송은 조선에 주둔할 때 부인과 자식도 뒀다. 정조 24년 4월 8일자 실록에는 "제독이 우리나라 사족(士族)의 딸을 맞아들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후손 중 처음으로 급제자가 나왔다"고 적혀 있다.
석성과 이여송의 초상화가 현전한다. 석성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여송은 우리나라 초상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일본 덴리대에서 갖고 있다. 망명한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들로 추측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