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던진 기생 계월향, 임란때 평양성 수복 큰 공

▲ 의기 계월향 초상화 /사진 제공=국립민속박물관

[배한철의 한국초상화 읽기-45] "계월향(桂月香)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絢爛)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 볕을 받치고 매화가지에 새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 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桂月香)이여."(만해 한용운 '계월향에게')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 ?~1592)은 임진왜란 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죽은 논개와 더불어 '2대 의기(義妓)'로 불린다. 논개가 순국한 사실을 두고서는 이론(異論)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다.

　1592년 임란 당시 서울을 함락시킨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는 조선 침략 두 달 만인 6월 11일 평양성을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함락시킨다. 계월향은 포로가 돼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족이며 부장이었던 고니시 히(小西飛)의 진중에 있게 됐다. 처음에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으려고도 했지만 이를 포기하고 고니시 히의 애첩이 됐다.

▲ 김응서 장군 초상화 /사진=북한소재

계월향은 이미 평양성의 무관이던 김응서(金應瑞, 1564~1624)와 연인 관계였다. 그녀는 매일 평양성 서문 근처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던 연인 김응서를 만나 비밀리에 내통했다.

　그해 12월 드디어 이여송의 4만8000 대군이 도착하면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본격적인 평양 수복작전을 폈다. 앞서 7월 17일, 8월 1일 조선과 명나라 군대는 성을 공격했으나 패배한 바 있어 적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대규모 반격을 앞둔 시점에서 계월향은 "난리 중에 헤어진 오빠인데, 같이 살도록 해달라"고 청해 김응서를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녀는 고니시 히에게 술을 먹여 깊은 잠에 빠지게 한 뒤 김응서를 방으로 불러 단칼에 목을 베어 버렸다.

　김응서는 고니시 히의 목을 들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계월향이 말을 탈 수 없어 시간이 지체되자 혼자 성 밖으로 나가고 뒤에 남은 계월향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했다. 장수를 잃은 왜군은 대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이듬해 1월 초 평양성은 수복됐다.

　김응서는 천민 출신이었다.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그는 출신을 속인 채 무과에 급제해 감찰을 제수받았지만 이런 사실이 발각돼 곧 해임됐다. 임란 당시 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상황이라 운 좋게 다시 기용됐고 이후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천민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안도방어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등 무관의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김응서는 정보전에 능했다고 한다. 군관 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정을 살피게 했으며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김응서는 김경서(金景瑞)로 이름을 바꿨으며 종2품 포도대장에 올랐다.

　광해군 즉위 후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했다. 두 차례 전투 끝에 강홍립이 전군을 이끌고 후금 군대에 항복해 그 역시 포로가 됐다. 비밀리에 적정(敵情)을 기록해 고국에 보내려다가 강홍립의 고발로 처형됐다. 후일 우의정에 추증됐다.

　'남(南) 논개, 북(北) 계월향'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라를 구한 기생으로 계월향을 높게 평가하지만 사실 김응서가 계월향을 이용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옛 연인을 만나 기뻐하기도 잠시, 원수의 애첩이 됐다는 고백을 여자에게서 들었을 때 남자는 지조를 지키지 못한 그녀를 크게 원망했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계월향이 연인의 탈출을 돕기 위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응서가 서둘러 빠져나가기 위해 계월향을 죽였다는 설화도 전해온다. 그림 윗부분에 그녀 관련 일화가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둘 다 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계월향의 청으로 김응서가 칼을 뽑아 그녀를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

　어쨌거나 김응서는 평양성 탈환에 기여한 공로로 출세가도를 달린다. 계월향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의기였는지, 아니면 김응서가 출세욕에 눈이 어두워 연인을 저버렸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평생 그를 괴롭혔던 천민 신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응서 초상화는 평양 출신 화가인 이팔용이 1729년에 모사한 것이다. 무관예복 차림인데 명료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그려낸 치켜 올라간 눈매, 무겁게 꾹 다문 입은 삼대를 베어내듯 왜병들을 쓸어버렸던 용장의 성격과 담력이 잘 반영돼 있다. 김응서 초상화는 현재 북한에 소재한다.

　계월향도 초상화를 남겼다. 이 초상화는 그녀가 죽은 지 200년이 흐른 1815년 추모의 목적으로 제작돼 평양 장향각(藏香閣)에 봉안됐다. 일본 교토에서 입수돼 국내로 반입됐다. 언제 일본으로 유출됐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표정이 살아 있으며 자태가 곱고 10대 소녀로 보이는 앳된 모습이 잘 느껴지도록 세부 표현에 신경을 썼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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