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남은 1600년전 고구려 왕 벽화에 담긴 진실은

[한국 초상화 읽기 - 10] 고구려 왕족 출신인 을불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백부인 고구려 14대 봉상왕(292~300년)은 폭군으로 악명이 높았다. 봉상왕은 자신의 숙부인 달가가 280년 숙신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자 이를 시기해 즉위와 동시에 누명을 씌워 죽여 버린다. 그는 이어 의심의 눈초리를 자신의 친동생 돌고에게 돌려 역심을 품었다며 살해한다. 이때 돌고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을불이다.

▲ 미천왕비 주씨 추정 벽화

　을불은 아버지가 죽자 도망쳐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전전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거듭한다. 봉상왕은 끊임없이 사람을 시켜 그런 조카를 찾아내 죽이려고 시도하지만 을불은 매번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다.

　봉상왕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는데도 공궐을 짓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킨다. 2인자인 국상(國相) 창조리가 공사 중지를 간청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지금 왕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창조리는 여러 대신들이 자기와 같은 뜻임을 확인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봉상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두 아들도 따라 죽었다. 창조리는 비류강에서 배를 타고 있던 을불을 모셔와 옥새를 바치니 그가 바로 고구려 15대 미천왕(재위 300~331년)이다.

　미천왕은 재위 기간 고구려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낙랑군과 대방군 등 중국 세력을 몰아냈으며 한반도에서 요동으로 넘어가는 교통 요지인 서안평(요녕성 단동)을 점령했다.

▲ 미천왕 추정 벽화

　1949년 대동강 남쪽의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에서 고구려 귀족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화려한 벽화가 그려진 고분이 발견됐다. '안악 3호분'으로 명명된 무덤이다. 안악 3호분은 주인공 부부를 비롯해 깃발을 들고 있는 의장 기수, 왕을 보좌하는 관직명인 '장하독(帳下督)'과 도끼를 든 무사인 부월수, 격투기인 수박희를 하는 병사 등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 왕의 벼슬아치 장하독 모습

　과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장하독이라는 벼슬아치 머리 위에 단서가 될 만한 묵서명(墨書銘)이 쓰여져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 13년(357년) 10월 무자삭 26일 계축 사지절에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 현도, 대방태수, 도향후인 동수(冬壽)가 69세에 죽었다. 동수는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 출신으로 자는 안이다."

　이런 묵서명을 근거로 피장자가 동수라는 설이 일찍부터 제기돼 왔다. 하지만 근거가 약하다. 동수가 누구인가. 자치통감에 따르면 동수는 연나라 왕 모용황(297~348년)이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아우 모용인 측에 가담해 싸우다가 모용인이 패하자 고구려로 망명해왔다.

　그러나 무덤은 망명객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화려하다. 벽화의 중심 인물은 흰 비단으로 만든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있다. 고구려는 신분에 따라 복식과 관모를 달리했다. 구당서는 "고구려는 오직 임금만이 백라관을 쓰고 벼슬이 높은 자는 푸른 비단의 청라관을, 그 다음은 붉은 비단의 비라관을 착용한다"고 기록했다.

　일개 지방관에 불과했던 동수가 임금만이 쓸 수 있는 백라관을 쓸 수는 없다. 묵서명에 나열된 동수의 벼슬을 보더라도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는 장군 벼슬이며, 낙랑상은 낙랑군의 장군으로 역시 태수급 직위다. 창려, 현도, 대방태수는 군 장관이며 도향후는 태수급 장군들에게 하사하는 작위다. 또한 동수가 받은 직위는 명목상 관직에 불과했을 것이다. 낙랑, 창려 등의 지역이 당시 연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피장자가 중앙에 앉아 좌우 신하들에게 보고를 받거나 명령을 하는 모습이 왕을 떠올리게 한다. 출입구 좌우 수문장 격인 무관 바로 옆에 붉은 글씨로 '장하독' 관직명이 적혀 있는 것은 피장자가 왕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언급된다.

　회랑에는 10.5m에 걸쳐 무려 25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 무덤 주인의 '출행도'가 그려져 있다. 북과 종, 요 등 타악기와 작은 뿔나팔을 부는 고취군악대만 64명에 달하는 장엄한 행렬이다. 이 같은 행렬은 황해도 일부를 다스리는 토호 행차에 동원할 수 없는 규모다. 피장자가 탄 수레 앞에는 '성상번(聖上幡)'이라고 쓴 표식기를 든 인물이 서 있다. 성상(聖上)이나 성왕(聖王) 등 표현은 역시 국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동수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북한은 동수 무덤이 아니라고 뒤집은 후 '미천왕'이라고 주장하다가 다시 16대 고국원왕(331~371년)이라고 재수정했다. 국내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정황상 고국원왕보다는 그의 아버지 미천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고국원왕은 북상하는 백제 근초고왕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동수가 죽고 난 후 14년이 흐른 뒤 일이다.

　반면 미천왕은 동수보다 16년 먼저 사망했다. 미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사후에도 편치 못했다. 연나라 모용황은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렸다. 고국원왕 9년(339년)에 고구려를 침범해왔다가 세자 입조를 조건으로 철군했다. 고국원왕 12년(342년) 고구려가 환도성과 국내성을 수축하면서 결전의 의지를 다지자 연나라는 5만5000명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략해왔다. 싸움에 대패한 고국원왕이 환도성을 버리고 단기로 단웅곡까지 도망가자 모용황은 미천왕의 왕비 주씨, 고국원왕의 왕비, 고구려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시신을 탈취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 부엌에서 요리하는 여인들

　고국원왕은 343년 자신의 동생을 연나라에 보내 칭신입조(稱臣入朝) 굴욕을 감수하면서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되찾아 온다. 그해 고국원왕은 연나라 위협에 대비해 도읍을 평양으로 천도한다. 미천왕의 최초 무덤은 여느 고구려 임금들처럼 국내성 부근에 있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수도까지 남쪽으로 옮긴 상황에서 어렵게 되찾은 부왕의 시신을 언제 또다시 파헤쳐질지 모르는 북방에 모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국원왕은 이후 끌려간 어머니 주씨를 모셔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고 결국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후 왕모를 귀국시킬 수 있었다. 연나라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던 왕모 주씨는 귀국 후 곧 사망하며 평양 남쪽에 위치한 남편 능에 합장된다.

　그들 무덤에 동수의 묵서명이 있는 이유는 뭘까. 동수는 원수 같은 모용황을 내쫓기 위해 싸웠던 연나라 사람이다. 고국원왕은 모용황에게 시신을 탈취당한 미천왕과 모용황에게 13년간이나 납치됐던 왕비 주씨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동수를 함께 매장한 것이 틀림없다. 묘주의 얼굴 형태는 간략하게 묘사돼 있지만 코, 입 모습 등 이목구비 특징은 잘 살아 있다. 묘주 부인상은 여타 고구려 무덤의 여인상과 마찬가지로 다소 도식적인 양상을 띤다. 벽화는 여인 3명이 부엌에서 일하는 모습과 노루, 돼지 등의 고기가 쇠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푸줏간과 차고, 마구간, 외양간 등 당시 고구려 지배층 생활상도 잘 보여준다.

▲ 수박희를 하는 고구려 병사

[배한철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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