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로 약방 불태운 사건 개혁군주 정조의 처분은?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23] 1793년(정조 17년 ) 전북 부안에서는 박조이라는 여성이 최두일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그녀의 남편 김계추가 최두일에게 맞아 앓다가 사망하자 최두일을 죽여 남편의 원수를 갚았던 것이다. 박조이는 최두일을 죽이기에 앞서 관아에 최두일의 폭행으로 남편이 사망했다고 신고부터 해야 했다. 따라서 그녀가 최두일을 죽인 것은 명백한 살인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죄 방면됐다.

조선 후기 형사판례집인 '심리록'에 의하면 이 사건을 접한 정조는 "아내에게 있어서 지아비와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다 같은 삼강(三綱, 군신·부자·부부의 도리)인 바, 자식이 아비가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서 자식이 그 사람을 구타하여 죽게 한 경우에는 형률을 감한다고 법조문 중에 분명한 근거가 있다"고 뜻밖에도 박조이를 풀어주라고 판결했다.

▲ 심리록의 최종 판결자 정조의 친필. 문상정사(汶上精舍)의 풍모와 절경에 대해 정조가 직접 시를 짓고 쓴 작품이다. 조선임금 중 선조와 숙종이 명필이었고 정조는 이들에 다소 못미친다는 평가다. 보물 1632-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심리록은 정조가 대리청정하던 1775년(영조 51년)부터 1799년(정조 23년)까지 형조의 중요 사건을 다룬다. 초계문신(抄啓文臣, 규장각 소속 젊은 문신) 홍인호와 김희조가 정리해 1799년 완성했다. 32권 16~18책으로 이뤄져 있다. 책에는 총 1850건의 기록이 수록돼 있는데, 살인 또는 치사사건이 대부분이며 문서나 도장을 위조한 사건 등도 일부 포함한다.

각 사건은 어느 지역의 누구 옥사라는 것을 밝혀 표제를 달았고 사건의 경과, 직접적 원인 등 사건의 개요와 각 관서·형조의 보고 및 판단, 정조의 판부 등을 기재한다. 영·정조 연간 고문 금지, 공정한 옥사 처리 등 형사사건 처리가 정비되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18세기 말 각종 범죄에 반영된 서울과 지방의 사회상을 생생히 전달해 당시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 된다.

강간범을 죽였을 때 역시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전북 무주의 장우창은 1792년(정조 16년) 자신의 아내가 배선봉에게 욕을 당한 사실을 알고서 그를 찾아가 마구 때렸다. 배선봉은 구타 끝에 목뼈가 부러지고 뒤통수가 벗겨지는 중상을 입고 목숨을 잃었다. 사건을 조사한 관찰사는 "강간은 격분할 만하나 세게 때린 것은 의도적이었으니 강간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하더라도 용서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정조는 "강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간부를 죽이려는 분노가 폭발했으니 혈기가 있다면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아내가 스스로 증명했고 그자는 변명의 말이 없으니 강간 현장에서 체포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죄인을 두둔했다.

살인죄이더라도 쌍방과실이 인정되면 죄는 상대적으로 가벼웠다. 1799년 서울에 사는 이중한의 처는 인두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이웃의 정의복 처가 가져간 것으로 의심해 말다툼했고 치고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자들의 싸움은 남자들의 싸움으로 커졌다. 이중한은 정의복과 서로 밀고 밀치며 싸웠다. 정의복은 목이 부러져 죽었다. 형조는 "비록 죽일 마음은 없었으나 무거운 형률을 피할 수 없다"고 했지만 정조는 "서로 뒤엉켜 싸우다가 먼저 넘어진 자는 죽었고 그 위에 넘어진 자는 살았는데 어찌 무거운 형벌을 적용할 것인가"라며 가벼운 처벌을 주문했다.

무덤 쓰는 것을 놓고 소송이 끊이지 않았지만 살인도 벌어졌다. 경북 경산의 박사읍사는 1794년(정조 18년) 은삼손과 무덤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발로 음낭을 차 죽였다. 당시에는 사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들조차 묘지를 넓게 차지하려고 다퉜다. 그러다 보니 법으로 평민들은 분묘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없도록 금지했다. 그런데 박사읍사는 어머니 묘소가 은삼손의 조상 묘에 의해 머리가 눌리고 청룡이 침범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묘지 이장을 요구하다가 결국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됐다. 임금은 "범행이 사납고 간특하다"며 엄중 처벌을 지시했다.

실화를 했다가 사형을 당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1780년(정조 4년) 서울에서 약방의 종 덕금은 오복과 함께 약초를 찾으러 창고에 들어갔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다가 불똥을 떨어뜨렸다. 불은 순식간에 약초로 옮겨 붙었고 건물을 모조리 불태웠다. 사건을 조사한 형조는 사형죄라는 의견을 냈고 임금은 이의를 달지 않았다.

식량난에 허덕이던 시대에 식인행위가 있기는 했지만 영·정조의 태평기에도 시체를 먹은 사건이 발생했다. 질병 치료가 목적이었다. 1777년(정조 2년) 강원도 양양에 사는 김조이라는 여인은 아들과 손자가 한꺼번에 매독에 걸려 치료 방법을 고심했다. 그는 사람의 시체를 먹으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7촌 조카가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는 이재득을 시켜 조카 무덤을 파서 왼쪽 팔을 잘라다 아들과 손자에게 먹였다. 죄가 발각돼 주모자인 김조이와 이재득은 교형에 처해졌다. 사건을 접한 정조는 "6촌의 자식에게 이처럼 참혹한 짓을 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흉악하다"고 했다.

▲ 조선시대 술김에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빈발했다. 그림은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고 싸움이 벌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유곽쟁웅'(혜원 신윤복 전십첩 中). 국보 135호. 간송미슬관 소장

24절기나 명절이 끼면 감형받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경남 산청에 사는 김선이는 1795년(정조 19년) 박성문과 함께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오른 박성문은 김선이의 갓을 망가뜨렸고 화가 난 김선이는 박성문을 발로 마구 차 숨지게 했다. 형조에서 "살인한 사람을 사형하는 법을 굽히기 힘들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은 "오늘은 입춘이다. 천지의 대덕(大德)은 살리는 것이니 한 등급을 감하는 형벌을 시행토록 하라"고 전교했다.

관리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사망하게 했다면 어떨까. 1790년(정조 14년) 경북 안동에 접수된 사건이다. 권득문은 진영(鎭營)의 장교였다. 그는 도적을 잡는다며 평소 나쁜 감정을 갖고 있던 원복이라는 노비를 묶어놓고 때려 죽였다. 임금은 "근래 도적을 잡는 포교와 나졸들이 민간인을 침학하는 일은 실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 됐다. 사안이 비록 공무로 인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범행에 사심이 있는 것이니 살려 주자는 논의를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엄중히 꾸짖었다. 이어 "죄인을 엄하게 세 차례 형문한 후 절도(絶島)에 종신 유배하라"고 명했다.

▲ 조선시대 태형집행 풍속도(조선말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中)

관리나 아전의 농간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보복의 수준이 도를 넘어서면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1779년(정조 3년) 강원도 철원의 노일봉은 아전 김이태가 첨정(簽丁, 장정을 군적에 기록하는 일)을 중복해서 올린 데 불만을 품고 김영재와 공모해 한밤중에 김이태의 집을 방화했다. 결과적으로 3명이 화마에 희생됐다. 김이태의 행위는 분명 잘못이지만, 한밤중에 가정집에 불을 질러 다수의 무고한 희생자를 낸 데 대해 정조는 격노했다. 주모자 노일봉은 능지처사( 대역죄나 패륜을 저지른 죄인 등에게 가해진 극형, 신체를 여섯 부분으로 잘라 각 지방으로 보내 두루 보이도록 하는 형벌)에, 김영재는 부대시참(참형은 추분 이후 춘분 이전에 집행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는데 이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참형에 처하는 형벌)에 처해야 한다고 형조가 의견을 내자 정조는 이를 그대로 윤허했다. 심리록에 이처럼 능지처사 처분이 내려진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강원도 화천의 길인항은 1790년 고을 수령을 무고하는 글을 돈화문에 붙였다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정조는 도성을 무단으로 들어와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의 대문 앞에 이 같은 글을 걸어놓은 데 대해 불같이 화를 냈다. 정조는 "근래 들어 도성에 들어오는 일이 자유로워져 해괴한 일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엄하게 타이르려고 마음 먹었는데 결국 이런 일이 터지고 말았다. 관아의 당하관들이 낮에는 침상에 기대어 담배나 피우며 하루를 보내고 초저녁부터 코를 골며 자고 있다. 발견되는 즉시 잡아다가 처벌하라"면서 "간사한 백성도 해당 도로 보내 법대로 다스리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궁궐의 물건을 훔치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처벌의 강도는 많이 달랐다. 1781년(정조 5년) 서울의 방우성은 황종(黃鍾)을 가져갔다가 들켰다. 형조에서는 범인에게 부대시참의 형을 내리고 관계된 자들도 벌을 줘야 한다고 주청했다. 임금은 "종은 가격이 1푼에 지나지 않아 재물과 같지 않다. 만일 범인이 종을 훔쳤을 때 사형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며 "죄인을 유배하라"고 결정했다.

같은 해 내의원에서 은그릇을 절도한 노비 태산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태산은 남 몰래 여러 차례 은솥을 가져가 재산을 불렸다. 형조에서 부대시참을 요구하자 임금이 이를 윤허했다.

문서 위조죄는 가중 처벌했다. 서울의 김천룡은 1794년 파직된 화량(花梁, 화성) 첨사를 유임시킨다는 내용의 전교(임금의 명령)를 전달하면서 음식을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전교는 조악하기 짝이 없어 현장에서 발각됐다. 형조는 범인이 자백했으니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조는 "죄는 사형죄를 면할 수 없으나 그 인물이 지극히 우매해 위조라는 죄가 얼마나 중한 일인지 모른다. 엄하게 매질한 뒤 멀리 떨어진 섬에 기한을 정하지 말고 종으로 삼으라"고 지시했다. 서울의 이진은 1793년(정조 17년) 전교를 위조해 수령을 사칭하다가 붙잡혔다. 이진은 과거 가짜 상소사건에 연루돼 섬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그는 김천룡과 달리 부대시참에 처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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