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의 다섯 번째 이야기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의 법흥사(法興寺)이다. 원주 치악산 너머, 평창과의 사이 은근히 외지고 깊은 곳 사자산 아래에 위치한 (지금은) 비교적 작고 소박한 절집이다. 사자가 없는 우리나라에 무슨 연유로 사자산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불교의 영향으로 생긴 이름이 아닌가 싶으니 구산선문 절집이 이곳에 생기고 나서 다른 이름이었다가 사자산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추측해본다. 일설에는 원래 네 가지 재물이 있다는 뜻에서 사재산(四財山)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사자산문(獅子山門) 사자산(獅子山) 법흥사(法興寺)
법흥사는 원래 흥녕사(興寧寺)로 불렀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에 모셔져 있는 문수보살상 앞에서 7일간의 기도 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발우를 전수받아 해동국 사자산 연화봉에 이르러 적멸보궁을 세우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흥녕사라 하였다.
이후 신라말 도윤 철감국사가 중국 마조 도일선사로부터 선법(禪法)을 전수받아 사자산에 선문을 여니, 그 이름이 사자산문이다. 사자선문은 우리나라 선종의 효시라 할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철감국사의 제자 징효 절중국사에 이르러 더욱 사세(寺勢)가 번성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병화(兵禍)와 대화재를 만나 전소된 후 천년 가까이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 스님이 중건하고 사찰 이름을 법흥사로 개칭하였으며, 1933년 현 위치로 사찰을 이전하였다. 지금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소박한 적멸보궁은 1939년 중수를 시작하여 1946년에 마쳤으며 당시 속세 나이 27세에 불과하였던 탄허 스님이 상량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1991년 적멸보궁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구산선문으로는 흥녕사가 맞으니, 법흥사는 이후 지어진 절집이요 우리가 부를 때는 흥녕사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현재 법흥사는 대부분이 불자들이나 방문객들이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찾는 것이 더 큰 이유이지, 이곳이 신라말 크게 번창했던 구산선문 중 사자선문의 대표 사찰인 줄 아는 이는 생각보다 적어서 아쉽다.
법흥사 둘러보기
술이 나오는 샘 주천(酒泉)의 전설이 있는 주천면 위에 수주면이 있는데 이를 휘감아 도는 주천강은 깊숙한 법흥 계곡에서 흘러나온 법흥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강이다. 법흥 계곡 깊숙한 곳에 사자산이 있고 그 아래가 법흥사인데 계곡은 생각보다 깊고 길어서 수주면에서도 10Km는 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계곡 안쪽으로는 주로 캠핑장과 펜션들만 보일 뿐 민간 마을은 드문 편이다.
▲최근 세운듯 보이는 거대 규모의 일주문, 사자산 법흥사를 달았고 안쪽에는 사자산문 흥녕선원으로 구산선문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계곡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으로 꺾이면서 법흥사 영역인데 첫 만나는 문이 일주문인지 산문인지, 얼마전까지 없었다는 기억인데 아주 크고 우람하게 세운 건축물이 나타난다. 이제 곧 법흥사임을 알려준다. 예사 일주문 같지가 않고 나름대로 거창하고 원대한(?) 포부를 세운듯한데 우리가 보기에는 과(過)하다 싶다. 게다가 양쪽 기둥아래에는 왼편에 거북과 용이 섞인 영물(靈物)을, 오른쪽에는 사자를 세웠는데 그 의미가 잘 이해가 안 간다.
▲좌우로 돌담과 축대로 경계를 쌓은 중간쯤 개방된 곳에 누문(樓門)을 세워 2층은 원음루, 아랫층에는 금강문이라 하였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넓직한 주차장이 나오고 오른편으로 법흥사가 보이는데 비교적 평지에 횡으로 길게 몇 채의 당우가 보이는 매우 조촐하고 검소해 보이는 절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즐겨찾는 적멸보궁은 조금 더 뒷쪽, 윗편에 있다. 어정쩡한 모습의 누각이 출입문 구실을 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니 그동안은 외려 황량한 느낌이었을 듯 하다.
▲정면의 작은 건물은 만다라전이다. 만다라는 깨달음의 경지를 예쁜 기하학적 무늬로 그린 것인데 드물게 보는 전각이다.
누문을 들어서면 지형은 좌우로 길게 가로진 형태인데 왼편으로 커다란 불전 하나가 아직 현판도 달지 못해 새집인 채로 서 있고 그 오른편 뒷쪽에 징효대사 승탑과 탑비가 있다. 정면으로는 작은 규모의 만다라 전이 있고 그 오른편으로 오르막길이 뒷편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누문 오른쪽은 종무소나 각종 요사채 등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여러 채 모여 있는 비교적 단순한 배치이다.
징효대사 절중 (澄曉大師 折中)
신라 말 구산선문을 창시한 철감국사 도윤의 제자로 흥녕사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 정강왕과 진성여왕이 징효 대사의 도를 흠모했으며, 스님 법통을 이은 선객이 1000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서기 900년에 세수 74세, 법랍 56세로 좌탈입망한 징효대사의 승탑과 탑비가 정면 만다라전의 왼쪽 경사지가 시작되는 기슭과 그 아래 평지에 서로 가까이 놓여 있어 찾아보기 쉽다. 지금도 법흥사에서는 징효절중국사 헌다례로 대사를 기리며 모시고 있다.
▲징효대사 절중의 탑비와 승탑, 탑비 옆에는 까만 오석의 법흥사 중건비가 서있고 승탑 못 미처 이름모를 종형승탑이 보인다.
사각의 지대석과 거북 모양의 귀부는 별개가 아닌 하나의 돌이며, 여의주를 드러나게 입에 문 거북머리는 턱 아래 돌출 부분까지 합쳐져 매우 특이해 보인다. 그외 머리와 목 아래 부분은 비교적 단순하며 다섯 발가락이 온전히 보인다. 거북등에는 육갑의 귀갑 무늬가 보이며 그 안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받침대 위에 세워진 비신 글씨는 부분적으로 마멸되어 보이며, 지붕처럼 얹힌 이수는 모서리마다 용 한 마리씩 네 마리를 새겨 중앙에 올려진 보주를 놓고 다투는 모습이다. 정면 중앙의 제액(題額)에는 '고징효대사비(故澄曉大師碑)'라고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징효대사 탑비는 보물 제612호이다. 귀부, 비신, 이수가 온전하며 보인(寶印) 탑호를 받아 '징효국사보인지비'라고 한다.
▲탑비와 조금 떨어져 경사지가 시작되는 곳으로 몇 계단 오르면 징효대사의 승탑이다. 옆에는 어느 시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종형의 부도 한기가 무심히 서 있다.
팔각지대석과 복련 하대석과 팔각 중대석, 앙련 상대석 위에 둥근 모습의 장구형 몸돌에는 자물통 모양의 문비를 새겼다. 팔각의 옥개석에는 각진 모서리마다 귀꽃을 새겼으며 그 위로 큼직한 보개와 보주를 얹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징효대사의 승탑.
징효대사의 스승 철감국사는 전남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하여 그곳에 승탑을 모셨으며, 그의 제자 징효대사는 사자산문을 크게 중흥시킨 후 스승 철감국사를 사자산문의 개창조로 모시어 세웠다. 그러나 지금의 법흥사는 구산선문 사자산문보다는 적멸보궁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어 창건설화에 나오는 자장율사와 징효대사를 조사전에 모셔놓았을 뿐 철감국사를 모신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절집 왼쪽에 세워진 조사전. 중흥조 징효대사를 왼쪽에 창건주로 전해지는 자장율사의 진영을 중앙에 모셔놓았다.
적멸보궁(寂滅寶宮)
법흥사는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중국에서 부처님 사리를 가져온 자장율사가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곳 법흥사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현재 진행중인 구산선문 이야기를 마치면 5대 적멸보궁을 답사할 계획인데 법흥사는 구산선문과 적멸보궁이 겹쳐서 먼저 소개한다.
▲절집 중앙 정면의 만다라전 옆 길을 따라 십여분 올라가면 적멸보궁에 다다른다.
▲법흥사 적멸보궁,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크기로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투명 창문을 낸 것이 밖에서도 보인다.
적멸보궁 뒷쪽 언덕에는 자장율사가 수도했다는 토굴이 있고, 임자를 알 수 없는 승탑이 하나 보인다. 이 승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라고 했던 모양인데 최근들어 설득력이 없는지 그 말은 슬그머니 없어졌다. 그러면 진신사리는 어디에 봉안된 것인지? 오대산 상원사처럼 밝혀지지 않은 것인지? 일부에서 저 승탑을 사리탑이라고 부르는데 진신사리 봉안이 아니라 무명 스님의 사리탑이 맞을 것이다.
▲적멸보궁 뒷편 언덕, 토굴과 승탑이 보인다. 불교 관련 조각을 새긴 석축을 쌓았는데 조잡해보인다.
구산선문 종찰 아홉 곳 중 다섯 곳을 알아보았다. 나머지 네 곳은 대부분 폐사지로 남아 있는 곳이니 앞으로는 유적지 답사가 될 것이지만 계속 이어갈 계획이며 어찌보면 절집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지금까지의 산문보다 더 강한 느낌을 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