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경주와 전주를 소개할 때마다 천년 고도라는 수식어가 꼭 따라 붙는다. 신라의 경주는 천 년 동안 한 왕조의 도읍이었다면, 전주는 천 년 전 후백제의 도읍이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900년 견훤은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뒤 나라의 이름을 후백제로 선포하고 백제의 계승과 신라의 타도를 선언했다. 936년 고려에 멸망될 때까지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이었다.
비록 37년의 짧은 역사였지만 전주 동고산성에 남겨놓은 후백제의 자취는 참으로 대단하다. 1990년부터 시작된 7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전주 동고산성의 전모가 파악됐다. 전주 동고산성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는 주건물지는 그 길이가 84.2m로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조선시대 전주부성을 쌓을 때 대부분 헐린 성벽은 옥수수 낱알모양으로 잘 다듬은 성돌만을 가지고 쌓아 최고의 축성기술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종래에 전주 동고산성을 후백제 왕궁으로 보았다. 이제까지의 학술발굴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주건물지를 비롯한 발굴 결과를 토대로 동고산성을 후백제 왕궁으로 비정했다. 후백제 왕궁이 평지가 아닌 승암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그 북서쪽 골짜기에 내성과 중성, 외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고학 자료를 문헌에 접목시켜 그 위치를 비정함으로써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승암산 북쪽 골짜기는 풍수지리상 거주공간으로 조성되기 어려운 곳으로 본래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만약 왕궁이 있었다고 한다면 인위적으로 조성된 비교적 넓은 대지와 성벽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더욱이 전주 동고산성의 모든 건물지에서 겨울철 보온을 위한 온돌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고, 일상생활에 사용된 유물도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주 동고산성설은 고고학 자료로 시작해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그 이후에 제기된 몇 가지 의문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주고교 서쪽 무랑물을 왕궁으로 본 견해도 있다. 후백제 왕궁이 있었다는 구전과 고토성, 무랑물에 쌓아둔 1만 여개의 석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아직은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구전의 내용과 고토성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 큰 과제이다. 여기서 무랑물 일대에 쌓아둔 초석으로 추정되는 각이 진 석재나 대형 천석 등은 인봉리 왕궁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측된다.
전주감영지 발굴 내용을 정리 분석하여 옛 전북도청을 왕궁으로 비정한 주장도 있다. 통일신라 유구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담장 기초시설, 배수시설 등이 확인된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그런데 백제의 재건을 최고의 목표로 내건 견훤이 통일신라 완산주의 주치로 대부분 도시화가 진행된 전주감영지에 후백제의 왕궁을 두었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최근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리에서 후백제 왕궁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보면 1100년 동안 긴 잠에서 이제 막 잠을 깬 역사적인 순간이다. 견훤은 평상시 평지성인 중노송동 인봉리 왕궁에 머물러 있다가 위급할 때 피난성인 전주 동고산성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마치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는 고구려의 도성체제와 일맥상통한다.
후백제는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동서로 긴 사다리꼴 모양의 궁성을 둘렀다. 당시에 풍미했던 풍수지리설에 근거를 두고 전주 동쪽에 반월형의 도성을 두른 뒤 그 중앙부에 왕궁을 배치했다. 견훤은 줄곧 미륵신앙에 관심이 많았고 본인을 스스로 미륵으로까지 칭했다. 당시 미륵신앙의 영향을 받아 후백제 왕궁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 미륵전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 최근에 그 모습을 드러낸 후백제 왕궁터에는 풍수지리와 미륵신앙에 함께 반영됐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자 궁성의 서쪽 성벽을 방죽 제방으로 삼아 인봉리 방죽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후백제 왕궁터가 인봉리 방죽 속으로 수장된 것 같다. 그리고 1949년 방죽을 메워 공설운동장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주택단지인 문화촌으로 개발됐다. 그렇다면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는 왕궁에서 방죽으로 다시 공설운동장과 주택단지로 그 운명이 바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