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태종 이세민. 목은 이색의 시에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이 화살을 맞아 눈을 잃었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다른 역사서에서는 이런 사실을 전혀 찾을 수 없다.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17]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어머니인 유화(柳花)는 중국 황제의 딸일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1075∼1151)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를 접대한 중국 관리가 우신관(祐神館)이라는 건물 안에 놓인 여선상(女仙像)을 가리키며 "이 상은 귀국의 신인데 누구인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김부식이 대꾸하지 못하자 중국인은 "여자 신선은 옛날 황제의 딸이었지만 남편 없이 아이를 가져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바다를 건너가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다"며 "그녀는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경주 효현동 소재 산)에서 영생(永生)한다"고 귀띔했다.
조선 전기 대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쓴 한문수필집 '필원잡기(筆苑雜記)'가 이 놀라운 얘기를 전한다. 책은 고금을 통달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역사에서 누락된 사실과 시중에 떠돌던 한담(閑譚) 등을 수집해 담았다. 조선 초기 인물과 세태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수준 높은 문장으로 우리나라 설화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권 1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1487년(성종 18) 발간됐다.
서거정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초에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동명왕 출생에 유화의 일이 있을 뿐"이라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런 말이 나온 것 아닌가 한다"고 얼버무렸다. 최근 일각에서는 진한이 신라의 옛 지역이고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점을 들어 중국 황제의 후손은 동명왕이 아닌 박혁거세라는 주장도 편다. '삼국유사'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일부 언급돼 있다.
▲ 이색 영정. 이색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태조 주원장에게 중국어를 못하고 얼굴도 못 생겼다고 놀림을 당했다. 귀국후 이색은 황제가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헐뜯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는 고구려를 공격했던 당태종(이세민)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잃었으며 눈병이 도져 사망했다고 모두 알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일까. 이 얘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의 시 '정관음(貞觀吟)'이다. 이색은 "어찌 알았으랴. 현화(당태종의 눈)가 백우전(화살)에 떨어질 줄을(那知玄花落白羽)"이라고 읊었다. 이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여러 야사와 수필집, 시가집에 등장한다.
서거정은 이 내용을 소개하면서 '당서(唐書)'와 '통감(通鑑)'에 모두 실려 있지 않고 '삼국사기'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태종이 처음 고구려의 연수(延壽)와 혜진(惠眞)이 발해의 군사를 인솔하고 진(陣)을 40리 거리에 뻗치어 포진한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써져 있어 중국에서 고구려군이 강력했다고 인식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역시 태종이 화살을 맞아 부상했다는 내용은 이 책 어디에도 없다. 서거정은 "비록 이런 일이 있었더라도 중국 사관이 숨겼을 것이니 쓰지 않은 것이 괴이할 것은 없지만 이색이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논평했다.
상고사와 고대사를 기록한 우리 책이 없는 것을 크게 개탄한다. 고조선이 8조법을 일으키고 정전법(井田法·토지를 9등분한 뒤 중앙의 토지를 공동 경작해 수확물을 국가에 바치게 하는 고대 중국의 조세 제도)을 행했지만 이런 사실은 중국 역사서를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다. 서거정은 "당대 어찌 사관이 없었으리오마는 서적에 전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이 솥발처럼 대치했지만 이 역시도 우리 역사로 전하는 것이 없다. '삼국사기'는 '통감(通鑑)' '삼국지(三國誌)' '남북사(南北史)' '수당서(隨唐書)'에서 주워 모아 쓴 것으로 믿을 만한 글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절하했다.
고려의 시조 왕건은 조상이 불분명하다. 고려 왕씨 세계(世系)를 정리한 김관의(金寬毅·생몰년 미상·고려 중기 학자)와 민지(閔漬·1248∼1326)는 왕건은 용의 자손이며 당나라 귀한 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서거정은 이러한 말은 모두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아버지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왕건은 삼국을 통일한 후 조상들에게 시호를 올리는데 조부모, 부모 등 단 2대뿐이었다. 고려는 왕건의 증조부 대신 증조모 쪽으로 계보를 연결시킨다.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고 북진정책을 편 것으로 미뤄 그의 조부 작제건은 당나라에 살았던 고구려 출신 상인의 자식일 것으로 추측한다. 어쨌거나 서거정은 "고려 태조가 자기의 증조를 두고서도 조상으로 모시지 않고 도리어 증조모의 아버지를 조상으로 모시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까"라고 비판했다.
▲ 황희 영정. 청백리의 대명사인 황희는 실제 뇌물을 받아 구설이 자주 올랐다. 하지만 성품이 한없이 너그러워 적이 없었다. 종의 자식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허허 웃기만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은 다양한 인물평과 일화를 싣고 있다. 황희(1363∼1452)는 '청백리'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뇌물을 밝혔지만 성품이 관대해 조정의 조정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정승의 자리에 30년 동안 앉아 있었다. 황희는 집에서도 성격이 너그러워 아들과 손자는 물론 종의 자식들이 울부짖고 장난을 치면서 떠들어도 꾸짖지 않았다. 자신의 수염을 잡아 뽑고 빰을 때려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과 집안 일을 의논하면서 책에다 이를 써내려가고 있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는 일도 발생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노여워하지 않고 손으로 오줌을 닦아낼 뿐이었다.
이색은 명나라에 황제(명태조 주원장)를 만나러 갔다가 황제에게서 심하게 놀림을 당했다. 황제는 이색의 이상한 중국어 발음을 두고 "그대의 중국말은 나하추(원나라 장수)와 같네 그려"라고 모욕을 줬다. 이색의 외모를 놓고서도 "(못생긴) 이 늙은이는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고 놀리기도 했다. 황제의 면전에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귀국 후 이색은 소심한 보복을 한다. "중국 황제는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헐뜯고 다녔던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그가 실언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서거정은 "(주원장이) 남긴 제도가 한나라와 당나라보다도 크게 뛰어나니 그릇이 작다고는 하겠는가"라며 "대업을 창조하는 데 정신을 두다 보니 이색과 같은 늙은 선비 보기를 곁에서 우는 어린애같이 마음에 두지 않은 것 뿐"이라고 논평했다.
정몽주는 조선 선비들이 충신의 대명사로 떠받들었지만 술을 즐겼으며 여색도 마다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마실 때면 남들보다 먼저 와서 맨 나중에 자리를 떴다. 벼슬이 크게 높아진 뒤에는 그가 함께하는 술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했고 술통에는 술이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여자를 두고서도 담담하지 못하다고 친구가 꾸짖었다. 그러자 정몽주는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공자도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하라고 했다.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고 대답했다.
책에서는 다양한 시대적 상황도 엿볼 수 있다. 사간원(국왕의 행위를 비판하고 관리를 탄핵하던 오늘날 언론과 같은 기능의 관청)과 사헌부(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처벌하던 오늘날 검찰과 같은 기능의 관청) 관리들의 근무 태도가 극명하게 비교된다. 사간원 관리들은 송사나 옥사를 심리 판결하는 사헌부와 달리 일이 없어 날마다 술 마시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조선 초 문신인 조운흘(1332∼1404)은 이런 세태를 꼬집어 "한잔 한잔 다시 한잔(一杯一杯復一杯), 대사간이 춘풍 앞에 취해 쓰러졌도다(大諫醉倒春風前)"라고 시를 썼다.
사간원에서는 술이 식전부터 제공된다. 숙직한 관원이 일어나기 무섭게 잡무를 보는 서리들이 아침인사를 하면서 술상을 차려 올린다. 안주는 약과이며 잔은 거위 알만큼 컸다. 관원들이 일제히 출근한 후에도 과일상을 차려놓고 종일 술을 마셔댔다. 커피나 차를 수시로 들듯 사간원 직원들이 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서거정은 "내가 대사간이 되고서 과일상을 폐지했지만 서리들의 아침인사상을 전과 다름없었다"고 전했다. 임금의 금주령이 내려져도 사간원은 개의치 않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반면 사헌부는 일 속에 파묻혀 살았으며 또한 사무 처리가 엄정해야 해 몸가짐이 철저했다. 하인들도 주인들과 행동거지를 같이했다. 사간원 관원은 붉은 옷을 입은 하인을, 사헌부 관원은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을 앞세웠다. 주인처럼 한껏 취한 사간원 관원의 하인들은 사헌부 관원의 하인들에게 "재미 없이 술도 못 마셔 얼굴 빛도 검고 옷도 검구나"라고 놀려댔다.
▷서거정(1420∼1488)=1444년(세종 26)에 문과에 급제했다. 문장으로 한시대를 풍미했으며 중국에까지 그의 명성이 알려졌다. 관직의 절반 이상을 학문 분야에서 종사했으며 조선 초기 국가의 서적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국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를 주도했으며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도 편찬했다. 역사·철학·역학·제도·지리 등의 분야에서도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