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한국의 역사 중에서 국민들로부터 가장 회자되는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일본과의 전쟁인 임진왜란만큼은 각종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서적과 인쇄물로 수없이 각색되어 나올 만큼 한국 역사상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유는 처절하게 패색을 보이다가 극적으로 이겼기 때문이다. 한두 달 만에 수도 한양은 물론 평양까지 빼앗기고, 임금인 선조는 명나라 코앞으로 몽진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망명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치욕적인 해석도 들려온다. 하지만 우리나라 수군에서는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했고, 진주성의 승리로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켜내며 결국 수도 한양을 수복, 최종적으로는 다시 왜군을 몰아냈던 승리의 전쟁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시절 선조를 대신해 분조라는 또 다른 정부를 운영하며 최전선에서 싸운 광해군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왕이 되었으며,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중에 사망, 결국 그의 아들인 히데요리가 그 자리를 이어받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전투에서 패배, 토요토미 가문은 일본 역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이기긴 했지만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아팠다. 7년간 국토가 유린되었으며, 순왜라는 전쟁 중에 왜군에 협조한 것으로 보이는 민간인은 모두 척살되었고, 한국의 도공들은 일본으로 납치되듯 끌려가 일본에게 수준 높은 도자기 기술과 발효기술까지 전파하게 된다. 조선을 도운 명나라는 국운이 쇠해, 결국은 청에게 주도권을 넘기며 자연스럽게 망국을 길을 걷게 된다. 이렇게 임진왜란은 동북아 3국의 정세를 뒤집어 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탄생도 했다는 것. 슬프기도 웃프기도 한 이야기, 임진왜란으로 태어나게 된 술, 김천 과하주를 소개해 본다.
원래 과하주는 여름을 나는 술. 약주에 소주 넣어 저장성 좋게 과하주란 술은 문헌에 수차례 등장한다. 한자만 풀이해도 바로 알 수 있다. 지날 과(過), 여름하(夏). 여름을 나는 술이다. 습기가 많고 온도가 높은 여름에 술이 산패되지 않기 위해 약청주에 소주(알코올)을 넣음으로써 저장성을 좋게 한 술이다. 외국에도 많다. 포르투갈의 포트와인, 스페인의 셰리와인, 일본에서 사케(일본식 청주)에 주정을 넣은 하시라쇼츄(柱焼酎）가 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과하천. 이 샘물로 술을 빚으면 모두 맛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주천이라고 불린다.(출처 문화재청)
왜군을 쫓다 마시게 된 김천의 물, 그것이 자신의 고향 물맛과 너무 같아 그런데 이 김천 과하주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임진왜란 시절,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실은 이여송 장군에 대해서는 역사적 평가가 상당히 엇갈리는데, 초기에는 왜군으로부터 평양성을 수복한 명장으로 보이지만, 조선의 백성을 쳐서 그 시신을 증거로 왜군을 이겼다고 거짓 보고를 하는 것이 드러나는 등의 행태로 결국 본국으로 송환을 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여송 장군의 집안은 조선출신이었다.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기회주의자적인 면을 보였다고 역사는 해석한다. 이러한 이여송 장군이 김천에 도착해서 마신 물맛이 중국에 있는 그의 고향 물맛과 너무도 비슷해, 그 샘물을 같은 이름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과하천이다. 그리고 이 샘물로 빚은 술은 김천의 대표 술, 김천 과하주로 자리매김한다. 즉, 김천의 과하주는 여름을 나는 과하주라는 의미 외에도 과하천으로 빚은 술이란 뜻으로도 이어진다.
김천의 어원, 술 맛 좋게하는 샘물 현재는 김천으로 바뀌었지만, 원래 김천의 어원은 금릉이었다. 김천의 어원을 살펴보면 쇠 금(金) 자에 샘 천(泉)이다. 이여송 장군이 마셨다는 과하천으로 술을 빚으니 그 맛이 너무 좋아 술 빚는 이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며, 이 샘에서는 금까지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돈을 벌게 해주는 샘물이란 이름으로 금천, 이후에는 김천이 된다. 이러나 저러나 술 맛이 좋은 지역이란 뜻임에는 틀림이 없다.
김천 과하주 23도. 저장성을 좋게 하기 위해 소주와 약주를 블렌딩한 혼성주이다
지금의 과하주는 어떻게 만들까? 현재 김천 과하주는 경북 무형문화재이자 식품명인인 송강호 명인이 빚고 있다. 찹쌀로 빚은 약주 16 도와 맵쌀로 빚은 증류주 23도 두 종류를 빚는데, 23도짜리는 약주에 증류식 소주를 넣은 술로 저장성을 좋게 했다는 일반적 과하주와 제조법이 비슷하다. 옛 김천 과하주의 양조법은 다음과 같았다.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과하천 샘물을 길어 찹쌀을 고슬고슬하게 찐 다음 같은 양의 누룩가루를 섞어 반죽한다.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서 독에 넣어 밀봉하여 1∼3개월간 저온으로 발효시켜 거르는데, 이때 물은 넣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정월 대보름도 아니고 과하천 샘물로 빚지 않는다. 하지만 과하천에서 불과 2킬로 떨어진 곳에 양조장이 있다. 그 문화적 가치는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김천 과하주는 발효숙성까지 40일. 저온 발효. 약주는 1년. 소주는 2년 정도 숙성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과하주가 등장 아이러니하게도 난중일기에도 과하주가 등장한다. 실은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술을 많이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과하주에 대하여 맛 등에 대한 평가는 없다. 하지만 김천 과하주와는 다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적어도 이순신 장군이 과하주를 마셨을 때는 김천은 왜군의 손아귀에 있었을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직지사 대웅전 전경(출처 문화재청)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사명대사가 있던 직지사.... 김천에는 유명한 절이 하나 있다. 삼국시대 때 세워졌다는 직지사. 직접 자로 재서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 때 맹활약을 펼친 승려가 이곳 출신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포로교환까지 하러 일본에 다녀온 그의 이름은 유정.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명대사다. 이곳에서 출가를 했으며 30살에는 주지스님까지 맡았다. 그런 사명당이 있던 직지사 주변에는 김천 과하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 많다.
역사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며... 임진왜란을 통해 김천 과하주가 시작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지만, 실은 전쟁은 술 문화 자체도 송두리째 바꾼다. 본질은 좀 다르지만 일본도 패망 후에 쌀로 술을 빚지 못해 오키나와는 타이 쌀을 가져와 아와모리 소주를 만들게 되었고, 가고시마의 아마미섬은 사탕수수의 흑당을 사용한 소주를 빚었다. 청주 역시 일본은 전쟁 시에 3배 증양주란 합성감미료와 주정을 섞은 술을 만들고, 희석식 소주도 이때 더욱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결국 전쟁은 문화를 왜곡시키지만 그 속에서도 문화는 태어난다는 것이다. 전쟁이 주는 아이러니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