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흑치국이 있었을까?

▲ 흑치상지묘지명 :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비운의 명장 흑치상지의 묘지명

[물밑 한국사-6] 나당연합군이 사비성 앞에 도달했다. 백강의 입구에서, 황산벌에서 막아보려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겁이 나 웅진으로 달아난 의자왕은 수하의 배신으로 다시 사비성으로 끌려왔다. 신라군을 총지휘하여 사비에 입성한 신라 태자 법민(후일의 문무왕)은 의자왕에게 술시중을 들게 했다. 이 광경을 목도한 백제 신하들은 목을 놓아 울었다.

　당군의 총지휘관인 소정방은 의자왕을 옥에 가두고 사비성을 노략질했다. 주군의 모욕과 적군의 대약탈! 백제 풍달군의 장군 흑치상지는 항복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백제부흥운동에 나선다.

　그가 거병을 하자 순식간에 모여든 군병이 3만. 무용을 떨치자 200여 성을 회복했다. 자칫 나당연합군의 승리가 무위로 돌아갈 판이었다. 하지만 백제부흥운동을 지도하던 복신과 도침, 부여풍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만다. 이에 염증이 났던 탓일까? 흑치상지는 당나라 유인궤에게 항복하고 칼끝을 돌려 백제부흥군의 토벌에 나선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희망은 그가 처음 거병했던 임존성이었다. 임존성을 지키는 지수신은 백제부흥군이 백강 전투에서 파멸적 괴멸을 당한 이후에도 철벽의 수비를 자랑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한 달여를 공격했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했다. 문무왕은 "이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공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정신승리의 말을 남기고 군사를 물렸다.

　이리하여 임존성의 함락은 당의 몫이 되었는데, 당은 흑치상지에게 임무를 주었다. 흑치상지는 자신이 거병한 성을 함락시켜야 하는 배반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함락시켰고, 당에 자신의 충성을 확인시켰다. 흑치상지는 이후 당의 장군으로 당이 돌궐과 싸우는 서부전선에서 대활약을 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승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반란을 꾀한다는 누명을 쓰고 60세에 죽임을 당했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배반자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되는 영광을 얻었을까? 홀로 끝까지 싸운 지수신이나 백제부흥군의 실질적인 지도자 복신은 열전에 없는데? 열전에 있는 또 다른 장군인 계백의 경우도 끝까지 싸웠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봐도 특이하다. 사실 그 답은 간단한다. 흑치상지는 신라적인 관점에서 수록된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적군이었던 장수가 자기쪽 편으로 넘어온 것이고, 당나라에서 높은 관직까지 올라가 맹활약을 한 자랑스러운 동족이었던 셈이다.

　흑치상지를 보는 현대적인 관점에도 이런 민족적인 감정이 깃들 때가 있다. 그의 활약이 마치 한국인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고선지와도 비견하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고선지에게는 최소한 배신의 전과가 없지만 흑치상지는 이 점에서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전환기에 태어나 걸출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비극으로 끝난 흑치상지의 인생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런 비극성이 그를 더욱 주목하게 만들어 온 것도 사실이다.

　흑치상지의 성은 '흑치(黑齒)' 즉 '검은 이'이다. 흑치상지의 조상은 원래 왕족인 부여 씨였는데 나중에 흑치 지역을 받아서 성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흑치라는 지방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의가 있다.

　이 문제에 앞서 '담로'에 대해서 알아둬야 한다. 중국 사서인 '양서(梁書)' 백제전에 보면 백제는 전국에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의 자제와 종족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나온다. 담로는 일반적으로 성(城)을 뜻하는 백제어 '다라'나 '드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담로는 성을 중심으로 다스리는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담로에 해외 식민지를 포함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흑치 지방도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다. 남방의 종족들 중에는 빈랑이라는 열매를 씹어먹어서 이를 검게 물들이는 경우가 있어서 흑치국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속은 일본에도 있었기 때문에 흑치 지방이 일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뿐이 아니다. 더 놀라운 주장도 있다.

　중국 광서장족자치구에 보면 '백제허(百濟墟)'라는 지명이 있다. 아니, 중국 땅에 어째서 '백제의 옛 터'라는 뜻의 마을이 있는 것일까? 여기에 당나라에 끌려간 백제 유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 백제가 식민지를 건설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 백제가 식민지를 건설했다면 그것은 검은 이를 가진 종족들의 땅인 흑치 지방이 아니었을까? 아하, 여기가 흑치상지 조상들이 경영했던 곳이구나!

　이렇게 자기 입맛에 맞게 상상하는 것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래, 상상하는 것은 역사학이 아니니까, 찾아가보자! 찾아가보니까 동진 시대 유물을 볼 수 있다. 어, 이거 백제에서도 나오는 유물이야! 감개무량! 이 동네에도 디딜방아가 있어, 백김치를 담그네, 정월대보름이 명절이야! 이런 것들을 증거라고 생각한다.

　디딜방아는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우리나라로 전파된 것이다. 채소 절임은 어느 곳에서나 찾을 수 있는 음식이다. 보름달을 기리는 풍속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중국도 기린다.

　이런 내게 좋아 보이는 증거 말고 객관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순천향대의 박현규 교수는 문헌조사와 현지답사를 병행해 조사했고 그 결과는 이러하다.

▲ 농기구 쟁기의 모습. 넓적한 삽처럼 보이는 것을 보습이라고 한다.

　백제허의 허(墟)는 옛 터가 아니라 장터를 뜻하는 단어다. 이 마을은 청나라 때인 1764~1820년 사이에 건립되었다. 그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즉 백제 시대와는 아무 연관성도 없는 때에 세워진 것이다. 그럼 대체 왜 백제라는 말이 들어있는 것일까? 이 백제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장족의 말을 음차한 것이다. '광서장어지명선집'과 '옹녕현지'에는 백제허의 지명은 보습날[犁頭口]과 닮은 촌락 지형에서 따온 것이라고 나온다. 장족 언어로 '백(百)'은 '구(口=날)'이고, '제(濟)'는 '리두(犁頭=보습)'라는 뜻이다. 백제(百濟)는 발음이 같은 '佰濟'나 '百오를 제'로 표기하기도 한다. 발음을 음차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한자를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때문에 이외에도 같은 지명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같은 지명을 이용해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임진왜란이 중국 땅 항주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엉터리 주장을 가려내는 것은 철저한 조사와 그에 입각한 증거 제시이다. 결과를 예단하고 그 결과에 맞는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문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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