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소의 뿔이 화려한 장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화각. 한국인에게 조차 생소한 이 재료는 왕족과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쓰인 우리의 전통공예다. 삶고, 갈고, 또 갈고, 오방색의 옷을 입은 뒤에도 단장을 더 마쳐야하는 진귀한 예술. 무형문화재 이재만 씨는 국가에서 인정한 유일한 화각장이다. 뿔보다 단단한 그의 손에서 화각공예의 명맥이 이어진다.
한국 고유의 공예, 화각
이재만 씨는 쇠뿔을 얇게 갈아 펴낸 ‘화각판’에 색을 입히고, 가구나 소품으로 재탄생시키는 화각장이다. 40대의 나이로 1996년 국가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최연소 무형문화재이며 동시에 유일한 화각장이다.
“화각공예는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공정과정이 까다로운 왕족의 공예였습니다. 수요가 많지 않기에 화각장 또한 적었죠.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공예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소가 귀했다. 농경사회에서 필요한 가축이기도 했으며, 소의 뿔은 활대를 만드는 재료로 쓰여 국가에서 관리했다고 전해진다. 일반인이 소의 뿔을 갖는 일은 거의 불가능 했다. 화각은 이 진귀한 재료를 이용한 공예다. 단단한 쇠뿔을 삶아 부드럽게 한 뒤에 평평하게 펴고, 0.02mm의 두께까지 갈아 투명하게 만든다. 무려 서른 가지가 넘는 공정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데, 쇠뿔 하나에서 화각판 하나밖에 얻지 못해 작품 하나에 수백 마리의 소가 필요할 때도 있다. 나무를 짜서 가구를 만들고 그 위에 장석을 칠해 달아야 하는 등 다양한 작업을 혼자 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기간도 역시 만만치 않다.
“화각은 어쩌면 제일 천박한 재료를 화려함으로 이끌어내 주는 작품입니다. 이런 과정이 힘드냐고요? 평생 해온 일인데요. 전 포기를 몰라요. 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도전으로 일궈낸 장인의 삶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리에 앉으면 끝을 봐야 일어나요. 나는 지금껏 한번도 내가 뭘 하면서 안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해내요.” 그런 마음으로 그는 40년간 화각 앞에 앉아있다.
이재만 화각장의 화각인생은, 1965년 그의 나이 열 세 살부터 시작된다. 자수장이던 어머님이 이 씨를 고(故)음일천 화각장에게 데려가면서부터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 화각공예를 재연하는 마지막 화각장이다. 앳된 이재만 화각장은 스승과 함께 지내며 빨래, 청소와 같은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제가 손에 장애가 있어요. 어릴 때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거든요. 어머님이 저 먹고 살 게 걱정돼서 데려가신 것 같아요. 그렇게 처음 화각을 알았죠.” 스승의 집에서 나온 건 20대 후반, 솜털 보송하던 학생이 청년이 되어서다. 여리던 그의 손은 어느덧 단단해 져 있었다.
한국 고유의 공예, 화각을 알리다
도안위에서 그의 붓이 움직인다. 밝은 색부터 진한 색 순서로 채색을 하더니 돌연 판을 뒤집어 보인다. 화각판 뒷면에 색을 입히면 앞면에 그림이 비추는 ‘복채법’이다. 채색을 입힌 뒤 소뿔을 더 얇게 갈아내면 그의 그림은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다.
왕궁에서 사랑받은 화각공예품엔 붉은 색과 노란색이 주로 쓰였다. 붉은 색은 권위를, 노란색은 화려함을 상징한다. 왕의 권력과 왕족의 화려함이 지속되길 바라는 의미가 담겼다. 기원의 의미는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화각공예에 들어가는 민화다.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식물에도 다양한 의미가 담겨있다. 원앙은 부부금슬, 박쥐는 행운, 물고기는 출세, 십장생은 장수, 석류는 자손번창을 뜻한다.
최근 이재만 화각장은 전통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있다. 다양한 표현을 위해 오방색을 섞어 간색(間色)을 만들어 쓰고,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을 연구한다.
“전통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기법으로 만들되, 디자인적인 요소는 현대에 맞춰야죠. 최근에는 외국인의 취향을 반영해 보라색을 새로 들였어요.” 그가 전통을 이어가는 방법이다.
최근 이 화각장은 인천한중문화관에서 전시를 준비 중이다. 10월 1일부터 일주일간 열리는 이번 전시는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다. “전통공예는 K팝처럼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지 않아요.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은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죠. 지금까지는 주로 해외에서 전시를 많이 했어요. 뉴욕에서는 해마다 전시를 해요. 이제 해외전시를 조금 줄이고 국내에서 전시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공예인으로서 알릴 수 있을 만큼 알려보려고요.”
화각은 우리나라 공예 중에서도 유독 접하기 힘든 분야다. 화각장은 이재만 씨가 유일하고, 전수를 받으려는 이도 많지 않다. 다행히 이재만 씨는 든든한 두 제자를 얻었다. 그의 두 아들이다. 그의 온전치 못한 손끝에서 화각공예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차지은 I-VIEW 기자 minsab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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