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섬마을 청년이 판소리를 만났을 때

방학을 맞았지만 그는 여전히 다음 학기에 필요한 강의 자료를 준비하느라 연구실을 지킨다.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그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 많은 청년이었고 지금은 한국인 아내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중년의 교수다.

“한국에 대한 첫 느낌은 경이로움과 충격 그 자체였죠. 첫 여정이 김포공항에서 길동까지 가는 거였는데, 지하철로 한 시간이 넘는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큰 도시가 다 있나!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죠.”

캐나다 시골의 작은 섬마을 출신 청년에게 도로를 메운 차량행렬과 번쩍이는 네온사인, 수많은 행인의 물결은 처음 보는 ‘딴 세상’이었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대학교수로서 강단에 서게 된 인연은 한국에 조금 더 머물게 되는 계기가 됐다.

“판소리 명창 소지영 선생님을 만난 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어요. 어릴 적 음치에 가까웠던 제가 판소리를 하며 관중 앞에 서게 될 줄은 꿈도 꿀 수 없었죠.”

8년 전, 난생처음 판소리 공연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가사도 내용도 모르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찾아다니면서 형용할 수 없는 판소리만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처음엔 그저 북장단이나 배워볼까 시작했지만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소지영 명창의 권유로 소리를 시작한 라이언 캐시디 교수. 현재 판소리를 배우는 외국인 1호 제자로 살고 있지만 그는 ‘과거에 뭘 알았다면 덥석 시작하지 못했을 거’라며 판소리의 정교함과 우수성에 대해 다시금 감탄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배움이 즐거워라

그의 노트에는 심청가 가사가 빼곡하다. 또박또박 정자체로 써내려간 글자 위엔 밑줄도 그어 있고, 스승에게 들은 코멘트도 깨알같이 적혀 있다.

‘범피중류 둥덩실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이로구나. 백빈주 갈매기는, 홍요안으로 날아들고, 어적이 여기렸만 곡종인불견의 수봉만 푸르렀다.’

외우는 건 고사하고 그대로 읽어 내리기조차 벅찬 단어의 나열. 한국인에게도 낯설기만 한 이것을 외우고 익혀 무대에서 공연까지 하는 어려움이 어떨지 짐작조차 어렵다. “지금도 이걸 내가 왜 하려고 했나 한다”며 고개를 내두르는 그의 얼굴에는 고비를 넘겨 본 사람의 여유가 느껴진다. 대회 수상도 하고 여러 번 언론의 조명도 받았지만 ‘판소리 이수자’라는 말에는 손사래를 쳤다. 이전에 그가 접했던 사군자나 검도가 그랬듯, 무겁지 않게, 할 수 있는 만큼 다가가고자 하는 자유로움이다.

판소리로 한국어를 배우고, 고전문학을 접하며 그 시대의 역사도 들여다보게 됐다. 또 무대 공연도 하니 한복이라는 전통복식에 대해서도 익혀야 하고, 공연자로서의 다양한 표현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밖에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던 세상을 보게 되는 건, 심봉사가 눈 뜨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요? 결국 모든 건 인간으로서의 공통적인 본성과 맞닿아 있어요. 심청가에 나타난 가족에 대한 고귀한 헌신은 세상 모두에게 통하는 진실 같은 거죠.”

청중과 주거니 받거니, 신명의 무대

외국인이기에 오히려 한국의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데에 자연스러운 호기심이 발동하고, 좀 더 쉽게 그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는 사람. 그에게 지금 판소리는 자녀들과 함께 집에서도 메기고 받는 한판의 즐거움이 되었다.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청중들도 함께 어우러지며 완성되는 예술이에요. ‘얼씨구!’ ‘옳거니!’ ‘으이!’ 하며 함께 호흡할 때의 그 신명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요.”

판소리 장단에 추임새 정도 넣을 수 있다면 K-Pop을 즐기고 힙합의 리듬을 탈 때 더욱 풍성한 감정과 표현을 담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그의 열변은 홍대에서도 만날 수 있는 판소리 공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판소리도 거리공연 하는 거 아세요? 10월 말까지 주말 저녁 홍대거리에 가면 볼 수 있어요. 한 번 맛을 보는 정도로도 충분히 그 멋과 흥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글‧김수연 사진‧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