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이 머무는 곳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김제 만경평야에 들어서니 가을의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유 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 낱알은 그래도 야물게 여물어 주었다. 제 몸이 겨운 듯 고개 숙인 이 삭들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달리니 빌딩 숲에 가로막혀 답답했던 시야가 오랜만에 호사 를 누린다. 김제시 죽산면에서 광활면으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는 ‘그 끝을 알 수 없다’하여 만 경들이라 불렸다. 깊어진 가을, 황금물결처럼 출렁거리는 만경들판은 작가 조정래의 표현처 럼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판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헛 제자리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김제의 너른 들녘 끝으로는 푸른 산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노령산맥의 힘찬 기운이 깃든 모 악산이다. 모악산은 김제의 지형을 배반하는 이단아처럼 보이지만 기실 평야가 갖지 못한 수직의 힘으로 이 지역 신앙의 근거지 역할을 해온 곳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산의 ‘기운’과 무관치 않다고 주장한다. 모악산의 배꼽 위치에 ‘오리알 터’가 있고 이곳에서 기운 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오리알터는 ‘올(來)터’의 의미고 올터는 메시아의 재림사상과 연 결되어 있다.

어머니의 품, 금산사 미륵불

모악산의 많은 종교 유적들은 현재와 과거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 백제 천년 고찰 금산사다. 국내 최고의 미륵성지인 금산사는 백제가 멸망한 뒤 새 세상을 간절히 기원한 백제 유민의 소망이 깃든 곳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백제 후기 사찰 건축의 단아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가람 배치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1,400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의 연륜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웅장한 3층 규모의 미륵전(국보 제62호)이다.

3층의 중축 구조로 지어진 미륵전은 한국 사찰에서 쉬 볼 수 없는 건축 양식은 한국 사찰 건축 의 백미로 꼽힌다.

미륵전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 공간에 11.8m의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3층을 통 으로 튼 높은 공간이 비좁아 보일만큼 거대한 규모의 미륵불은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업멸하고 56억7천만 년 후에 중생을 제도(濟度)하러 온다고 했다. 미 래의 부처 미륵은 과거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가난한 민초들의 정신적 구원자였고, 오늘도 백발의 노인이 간절한 맘으로 찾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서로 다른 뿌리가 하나로 이어진 땅

모악산은 예로부터 논산의 신도안(新都安), 영주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난리를 피할 수 있는 명당으로도 알려져 왔다. 이 때문에 각종 무속신앙의 본거지가 되었고 한때 80여 개의 신흥종교 단체들이 난립하기도 했다.

증산법종교의 발상지 또한 바로 모악산 자락이다. 증산교는 구한 말 어지럽던 세상을 바로잡고 구제하고자 했던 증산 강일순(1871~1909)에 의해 시작된 종교이다. 혼란한 세상, 빈천하고 병약한 백성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동곡약방을 열었는데, 그곳이 바로 모악산 금산저주지 건너편 시루봉 아래였다.

조선시대의 혁명아 정여립(1546~1589) 또한 서른아홉에 한양의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터를 잡고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반상의 귀천과 사농공상의 차별, 남녀차별이 전혀 없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다.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은 오리알터 아래 감곡 황새마을에서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꿈꿨다.

오리알 터 주변에는 증산계열 종파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증산의 유일한 혈육인 강순임이 세운 증산법종교, 제자 안내성의 증산대도회(백운동 교인촌), 제자 이상호·이정립 형제의 증산교본부, 제자 김형렬의 미륵불교, 제자 서백일의 용화교본부, 증산 외손자가 세운 전각 청도대향원, 증산의 둘째 부인 고수부(태을교)를 모신 도통사…. 그들은 오늘도 이곳에서 미래의 부처 미륵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믿음 만들어낸 성지

1900년대 초엔 개화의 물결을 타고 기독교와 천주교도 모악산에 터를 잡았다. 금산면에 위치한 금산교회는 전국의 기독교인이 성지 순례지처럼 들르는 유서 깊은 곳이다. 한옥구조의 교회 건물은 1908년 지어진 예배당으로 특이하게 ㄱ자 형태를 띠고 있다. 모서리의 설교 강단을 돌아들면 또 하나 마루공간이 나타나는데, 강단의 앞쪽은 남자석 옆쪽은 여자신도들이 나눠 앉아 예배를 보았다 한다. 100여 년 전 들어온 외래종교와 당시의 유교전통이 만들어낸 특별한 구조인 것이다.

금산면 화율리에 자리한 수류성당은 1889년 문을 열었다. 구한말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산 속에 숨어들었다. 당시 수류성당은 전북은 물론 호남의 주요 천주교 근거지였고,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켜냈다. 이런 역사 때문인지 수류성당은 그 동안 수많은 신앙인 뿐 아니라 사재들을 배출했다. 고은 시인은 모악산을 ‘산이 아닌 어머니’라고 읊었다. ‘홀로 높지 않고 타지 사람들마저 품에 들여 마치 어머니 품 속 같다’고 썼다. 각 종교의 정당성과 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언제나 약자 편이었고 민중들과 운명을 함께했던 수많은 믿음들을 품은 모악산은, 오늘도 산이 아닌 어머니의 품으로 미래의 희망을 틔우고 있다.

글 이현주 사진 남윤중

출처:월간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