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지자체, 927곳 첫 전수조사 韓銀 머릿돌엔 이토 히로부미, 옛 서울역엔 사이토 총독 글씨
- 문화재청 "훼손 않고 보존" "아픈 역사 교훈 삼아야" 의견에 일부선 "부끄러운 과거 굳이…"
일제(日帝) 강점기에 조선 총독 등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재에 새긴 글씨가 전국적으로 12점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지난 6월 말부터 한 달여에 걸쳐 전국의 사적과 등록문화재 927곳을 전수조사한 결과, 서울시의회(옛 국회의사당) 정초석(定礎石·머릿돌)과 공주 송산리 고분군 6호분 등 12곳에 일제가 새긴 기록이 남아 있다고 14일 밝혔다.
◇서울시의회서 일제 머릿돌 발견
서울 문화재에는 총 4개의 일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중구 세종대로에 있는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1935년 준공 당시 서울시장 격인 경성부윤(京城府尹)이 새긴 머릿돌을 새로 발견했다.
서울시의회(옛 국회의사당·왼쪽) 건물에서 발견된, 일제 고위층 인사의 글귀가 새겨진 머릿돌. 1935년 준공 당시 경성부윤(현 서울시장)인 다테 시오가 적은 글이다. 시의회 관계자는 “이런 돌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했다. /장형태 기자
머릿돌은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물에 기공 연월일과 유명인의 글씨를 새겨놓은 돌이다. 이 머릿돌은 서울시의회 본관과 별채 사잇길에 있는 에어컨 실외기와 건축 폐자재 사이에 방치돼 있었다.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머릿돌엔 '定礎 昭和十年六月一日 伊達四雄(정초 소화10년 6월 1일 다테 시오)'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소화(일본어로 쇼와)는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年號)이고 다테 시오는 당시 경성부윤(현 서울시장)이었다.
나머지 3개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과 서울시립미술관(옛 대법원 청사), 옛 서울역사의 머릿돌이었다. 한국은행 머릿돌은 초대 조선 통감(統監)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썼고, 시립미술관과 옛 서울역사 머릿돌은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의 글씨다. 사이토는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일제는 우리 고대 유적에도 흔적을 남겼다. 충남 공주 송산리 백제 고분군 6호분(왼쪽 사진) 내부 통로에 세워진 표지석(오른쪽 사진).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를 쓴 ‘쇼와 8년(1933년) 8월 발굴조사, 쇼와 8년 수리, 조선총독부’ 글귀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현재 6호분은 보존을 위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이 표지석은 볼 수 없는 상태다. /문화재청, 공주시
일제는 근대 건축물뿐 아니라 우리 고대 유적에도 흔적을 새겼다.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 6호분 통로 벽면의 표지석에는 '쇼와 8년(1933년) 8월 발굴조사, 쇼와 8년 11월 수리, 조선총독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송산리 고분은 일제의 무차별적인 도굴로 큰 피해를 본 곳이다. 현재 6호분은 보존을 위해 출입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이 표지석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알릴 필요 있느냐' 우려에… 정부 "보존해 알리겠다"
일제가 우리 문화재에 남긴 글씨는 광복 이후 대부분 훼손되거나 방치돼왔다. 경남 통영시 시민들은 지난 2004년 사이토 총독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동 배수시설(등록문화재 제150호)에 새겨진 '천록영창(天祿永昌·하늘이 내리는 복을 받아 길이 번창한다는 뜻으로 일왕을 찬양하는 표현)'이라는 글씨를 시멘트로 덮어버렸다.
일제가 건설한 서울시청 머릿돌도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 서울시 관계자는 "청사 착공을 알리는 1925년 신문 기사에 사진으로 실린 정초석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못 찾았다"면서 "일제가 남긴 머릿돌과 글귀는 해방 이후 대부분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번 전수조사는 광복 이후 처음 실시됐다. 문화재청은 일제가 남긴 기록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자랑스럽지도 않은 역사를 굳이 알릴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부끄러운 과거라고 숨기기보다는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ve heritage·부정적인 유산)'도 보존해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울시도 일제가 남긴 정초석의 유래와 내용, 역사적 교훈 등을 담은 안내판이나 해설 자료를 만들어 교육용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