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삶과 병풍

과거의 전통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오늘날, 일상에서 병풍을 사용하는 문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병풍은 한국인의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생활용구였다.

‘병풍’에 대한 어원을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바닥 위에 판을 세우거나 의자나 침대 등 가구 주변을 두르기 위해 여러 장의 판을 이어 붙인 것을 ‘병(屛)’ 또는 ‘장(障)’이라 하는데 둘 다 ‘가리다’라는 뜻이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병풍(屛風)’은 집안에 장식을 겸하여 바람(風)을 막기(屛) 위해 둘러치는 물건을 일컫는다. 이러한 해석을 종합하면 병풍의 기능은 무엇을 가리거나 막는 것이 일차적인 용도이고 그 위에 그림이나 글씨, 수(繡)를 곁들였기 때문에 벽면이나 공간을 꾸미는 장식용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병풍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중국의 주(周)나라 천자가 높이 8척의 판에 자루가 없는 여러 개의 도끼를 그려 벽에 두었다는 『예기(禮記)』의 기록이 병풍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신라시대 애장왕(哀莊王) 때 금실로 수놓은 병풍을 사용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병풍은 장방형으로 짠 나무틀에 종이를 바르고 종이·비단 또는 삼베에 그려진 그림이나 글씨·자수 등을 붙였으며 폭(화면)과 폭 사이는 종이나 경첩 등으로 접합시켜 접었다 폈다 하기에 이동성과 편리함이 뛰어나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2폭에서부터 4폭, 6폭, 8폭, 10폭, 12폭에 이르기까지 짝수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병풍의 종류 역시 형식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었다.

2폭의 것은 가리개 혹은 곡병(曲屛)이라고 하며, 머리맡에 치는 얕은 병풍은 머리병풍 또는 침병(枕屛)이라고 한다. ‘곽분양행락도’처럼 한 주제의 그림만으로 꾸민 것은 왜장병(倭粧屛)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러 가지 주제의 작은 그림들 또는 글씨·탁본·도장 등을 전면에 붙여서 꾸민 것은 백납병(百衲屛)이라고 하며, 자수를 놓은 것은 수병(繡屛), 나무로 만든 세로로 긴 틀 안에 끼워서 쓰는 병풍을 삽병(揷屛)이라고 한다. 또한 흰 종이만으로 바르고 어떤 문양도 칠하지 않은 병풍을 소병(素屛)이라고 하는데 왕실과 민가에서는 상중(喪中)이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

다채로웠던 궁중의 병풍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이미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곁들인 병풍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가에서의 병풍 사용량은 궁중의 수량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다. 그만큼 궁중에서 필요로 한 병풍의 수량과 종류는 많았다고 할 수 있는데, 왕실혼례나 회갑연, 국장(國葬) 등 각종 의례나 행사를 위해 사용하거나 대전(大殿), 중궁전(中宮殿), 동궁전(東宮殿), 나인(內人)들이 머무는 처소 등 궐내 거의 모든 전각에 병풍이 비치되었기 때문에 수량이나 종류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민가에서는 궁궐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다보니 병풍과 더불어 방안에 족자나 1m 정도의 키 작은 단병(短屛), 벽이나 창호에 그림을 붙여 내부를 아기자기하게 장식하는 방식이 발달했다면, 궁중에서는 넓은 내부를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고 방한효과를 높이기 위해 족자보다는 여러 폭으로 구성된 비교적 큰 규모의 병풍을 많이 선호하였다. 전각 안에 세워진 병풍은 입체적인 막(幕)을 형성해 하나의 공간 구조물로서 기능함과 동시에 전각의 용도에 맞게 그 안에서 생활하는 구성원들을 위한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임금의 어좌(御座) 뒤에 항상 놓였던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 통치자의 장소를 명확히 하고 권위를 상징하는 기능을 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1920년대 초 창덕궁 인정전 내부에 큰 봉황걸개그림이 내려진 어좌 주변에 산수·난초·백동자·와전문양 등이 그려진 각종 병풍과 소소한 단병이 배열된 모습을 통해 왕을 위호하고 내부를 치장하며, 방한의 목적으로 사용된 궁중 병풍의 활용상을 짐작할 수 있다.

궁궐을 장식한 병풍 속 그림

조선 궁궐에서 병풍은 거의 모든 전각에 놓였고 왕실행사에 있어 중요한 시각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던 만큼 용도에 맞게 다양한 크기와 주제로 제작되었다. 유교경전의 내용을 뽑아서 쓴 글씨병풍書屛)도 사용되었으나 단청으로 장식된 목조건축의 특성상 화려함과 장중함을 배가시키는 채색그림병풍이 더 많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채색병풍은 왕실의 존엄을 높이고 평안과 다복을 기원한 주제로 그려졌으며 오봉병, 모란병, 십장생도, 곽분양행락도, 책가도, 백동자도,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한궁도(漢宮圖) 등이 대표적이다. 아래에서는 조선궁궐에서 쓰인 몇 가지 그림병풍 사례를 들어 소개하도록 하겠다.

❖ 국왕의 상징, 일월오봉병

‘일월오봉병’은 국왕의 변치 않는 권위를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봉우리로 이루어진 도상(圖像)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봉병’ 이라고도 하며, 중국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 고유의 궁중회화이다. 이 병풍은 살아계신 왕이 거처하는 장소뿐 아니라 돌아가신 왕의 시신이나 초상을 모신 곳에도 반드시 놓았기 때문에 궁궐 정전의 당가(唐家), 선원전과 같은 진전(眞殿), 국장 시 설치한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에는 의무적으로 비치되었다. 양 끝에 소나무를 배치하고 그 가운데에 다섯 봉우리의 산과 해와 달을 그렸으며, 화면 아래에는 굽이치는 파도를 그린 구도가 공통적이다. 청색과 녹색, 붉은색 위주의 짙은 채색을 사용하여 사물과의 거리감을 배제해 도안화하고, 보수성이 강한 느낌을 주며 멀리서도 국왕의 존재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시각적 효과가 있다.(그림 1)

❖ 왕실의 장수를 빌다, 십장생 병풍

‘십장생(十長生)’은 장수를 상징하는 사물(해, 달, 산, 물, 학, 거북, 소나무, 대나무, 사슴, 영지)을 의미하며, 한국 고유문화 속에서 성립된 독자적인 길상 표현이다. 십장생은 이미 고려 왕실에서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민가에서 가장 많이 애용한 주제였다. 왕실에서는 왕대비와 대왕대비 등 왕실어른과 왕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들과 관련한 행사에 주로 사용하였고 간혹 가례 때 그려지기도 했다. 일월오봉병처럼 짙은 청록색과 붉은색이 대조를 이루는 강렬한 색상이 특징이며, 군데군데 배치된 사슴과 학, 거북, 구름 등이 신비롭고 상서로운 분위기를 전달해 준다.(그림 2)

❖ 다복함과 다산의 기원, 백동자도 병풍

‘백동자도’는 많은 어린아이들이 천진스럽게 정원에서 노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백자도(百子圖)’, ‘백동도(白童圖)’라고도 불렸으며, 여기서 ‘백(白)’자는 반드시 백 명의 아이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다’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백동자도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다산과 득남을 상징한 그림으로 그려졌다. 조선시대에도 백동자도 병풍은 득남을 상징한 그림이었는데, 왕실에서는 주로 가례 때 왕비 후보자가 정식으로 간택되기 전거처하는 별궁에 비치해 두고 득남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밖에 궁중연향 시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머무는 장소에 백동자도 병풍을 둔 것으로 보아, 향후 혈통승계를 위한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랐던 왕실의 염원이 담긴 그림이라고 하겠다.( 그림 3)

❖ 태평과 복락의 상징, 곽분양행락도 병풍

‘곽분양행락도’는 중국 당나라 장군이었던 곽자의(郭子儀)의 일생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곽자의는 80세 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장수하였고 자식들도 모두 성공한 삶을 살았기에 후대에 이상적인 일생을 보낸 인물로 상징화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숙종 연간(1675~1720)부터 곽자의를 복락(福樂)의 인물로 여기며 그를 칭송한 글이나 그림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수와 다복한 인생, 자손 번창의 의미를 담은 곽분양행락도는 왕세자를 위해 동궁전에 놓이기도 했지만 왕실 가례 때 왕비가 거처하는 별궁에 주로 비치하면서 19세기에는 주로 혼례용 그림으로 많이 그려졌다.

곽분양행락도는 하나의 스토리가 몇 폭으로 연결되어 그려졌기 때문에 모두 왜장(倭粧) 병풍 형식이다. 병풍 가운데 곽자의가 자손들에게 둘러싸여 연회를 감상하는 장면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부인과 시녀들, 아이들이 평온하게 거처하는 공간이 묘사되었으며, 왼쪽에는 손님들이 곽자의를 축하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명예와 장수, 자손 등을 두루 갖춘 곽자의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인식이 반영되어 그의 태평한 생활이 구현된 그림이다.(그림 4)

글‧황정연(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출처:월간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