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의 귀천을 상징했던 원시 자수

초창기 원시 자수는 달팽이나 조개껍데기, 돌이나 옥구슬, 깃털, 청동, 금·은 달개 등 입체적인 자연의 조형물을 직접 거죽 표면에 달아 3차원 체적 유형의 ‘올림수’와 면적 유형의 ‘새김수’ 자수침법으로 수무늬를 이루었다. 또한 인피 섬유나 동물 힘줄로 만든 실로 바느질과 그물, 망태기를 제작하면서 그 바늘땀 궤적의 점선과 매듭이 평면에서 전개되는 ‘평수’, ‘사슬수’ 유형의 자수침법이 함께 사용되었다. 신석기 이후 가락바퀴가 발명되고 양잠과 잠업이 시작되자, 비로소 부드럽고 유연한 촉감과 안정된 발색감이 우수한 양모실, 누에실의 자수품이 나타난다.

당시 동·서아시아에서 출토된 ‘홍색 모직 평수 천’이나 청동기에 부착된 ‘견직 사슬수 천’에서 간단한 기하무늬가 수놓아진 것을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다채로운 수무늬는 제정일치 사회의 의례문화에서 신분의 귀천과 존비(尊卑)를 나타내는 표지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지배계층의 의장(衣裝), 거마(車馬), 침장(寢裝)에 대한 자수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그 생산 규모도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사서 기록과 출토 자수품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주변 국가의 왕조마다 값비싼 옷감과 생활품에 자수를 놓은 사례가 빈번히 나타난 것에 비추어봤을 때, 우리 자수의 현황을 반추해 볼 수 있다. 특히, 2천 년 전 평양에서 출토된 ‘구름, 꽃가지 무늬 사슬수 자수천’을 보면 기(綺), 금(錦) 직물이 2~3가지 색채나 무늬를 짤 수 있는 수준에 그쳤을 뿐인 것에 비해, 자수는 무늬와 색채를 임의대로 화려하게 꾸밀 수 있었기 때문에 관영 수공업으로 성장하고, 고대자수의 기틀을 마련하는 전거를 마련했다고 본다.

종교적 색채를 담은 고대 자수

고대 자수에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미친 종교사상과 간다라 미술의 영향이 지대했다. 신라 애장왕 7년 때 의료(衣料), 병풍, 말안장, 다래의 자수 장식뿐 아니라 금수(錦繡)의 불공을 금령(禁令)한 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이 시대의 특색을 보여주는 불교 자수품은 고구려 사람인 ‘가서일(加西溢)’이 밑그림을 디자인하고, 백제의 ‘진구마(秦久麻)’가 제작을 총 지휘한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이 일본 국보로 남아있다. 故 한상수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 보유자가 20년간 연구 제작한 ‘능문라지천수국수장’은 7세기경 우리 장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수된 문라 직물과 자수의 원형기술을 복원하고, 1,500년 전 우리 고대 자수의 면모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그림 2).

정신까지 표출한 사실주의적 표현, 고려시대 자수

고려시대에는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이학(理學) 사상과 더불어 거란의 요, 여진의 금나라 등 북방의 초원문화적인 특색이 반영되어 화조, 산수 등 자연경물을 관조하고 정신의 내면세계까지 표출하고자 하는 사실주의적 표현이 중시되었다.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수막(繡幕)이나 수도(繡圖)에 관한 기록은 관상 위주의 미술 자수품이 성행하였음을 말한다. 실제로 안동 태사묘에 소장된 화훼단원문수(花卉團圓紋繡)는 꽃 형상의 묘사, 색실의 농담, 색차의 전이, 무늬 결의 방향 등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자련수 침법은 수작을 넘어 격물궁리(格物窮理: 진실을 깨닫는 일)의 시대적 철리(哲理)관념을 자수양식에 반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염원을 구현한 조선시대 자수

조선시대의 자수는 유교사회의 풍토에서 복(福), 녹(祿), 수(壽), 권(勸), 이(逸), 요(遊)의 내용을 담아 현세의 이상과 염원을 구현 하고자 하였다. 왕실의 궁수는 화원에서 설계한 정교한 도안과 화아장(花兒匠)이라 불리는 자수 장인들에 의해 공정을 나누어 종사하였다. 궁수의 특징은 실 꼬임새의 눈목이 알알이 살아있는 강연사(强撚絲)를 사용하고, 다채로운 색실을 배합하여 마치 부조와 같이 뛰어난 입체감을 지녔다. 또한 물총새나 공작새의 깃털, 금·은박을 면실에 감아 만든 연금사(撚金絲), 그리고 구슬, 보석 등의 재료를 활용해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표현했다. 15세기 이후 흉배제도가 시행되자 근엄한 군주의 표장(表章)으로부터 문무백관의 품계 구별, 서민의 길사(吉事)까지 자수흉배를 달았다. 영조의 차녀 화순옹주의 봉황흉배는 궁중자수의 예술성과 장인의 기량이 배어든 걸작이다. 자리수와 자련수, 이음수 등의 침법은 물론이거니와 수무늬결의 방향, 색채 배합의 표현이 매우 뛰어난 궁수(宮繡)의 진품이라고 할 만하다(그림 1).

반면, 민수(民繡)는 길복을 나타내는 자수문양에 색실의 수도 많지 않고 밑그림도 둔탁하나, 대비색채를 활용하여 배합의 묘미와 순박한 기운을 지녔다. 이러한 생활자수품에 대한 서민의 수요가 증가하자 사치의 폐단을 염려하여 이를 금지한 사실이 『경국대전』, 『속대전』, 『목민심서』 등에 여러 차례 기술되었다.

후기에는 비단의 명산지인 평안도 안주에서 병자호란 때 산동으로 귀양 간 선비가 소일거리로 배운 솜씨로 귀국 후 궁수(宮繡)에 종사하는데 이때 유래한 안주수(安州繡)가 전국에 보급되었다(그림 4). 자수특산품은 집단 수공업으로 보부상을 통하여 전국에 보급되었고, 이것이 조선시대 민수를 대표하였다.

이밖에도 궁실과 사대부가에서는 그림과 자수기법이 병용된 그림 자수(수화(繡畵))가 유행하였다. 성현들의 역사적 일화를 그린 고사설화(故事說話), 불로불사의 신선이나 현실구복을 희구하는 신선사상, 신화(神話)를 주제로 당시 규중여성들에게 길상을 염원하고 내적수양을 함양하는 덕목으로 널리 선호되었다. 예를 들어 한상수자수박물관에 소장된 ‘사군자수화액’은 기운찬 일필휘지의 중봉과 대조되어 한 땀씩 빚어낸 수무늬가 풍부한 형상미와 소박한 색채미를 이루고 있어 감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그림 3).

현대에도 살아 있는 자수의 예술정신

오늘날 전통자수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예술의 조류 속에서 여전히 자수의 예술정신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훌륭한 자수품을 마주할 때 느끼는 깊은 감동은 자수의 행위가 기술적 공예성을 극복하는 동시에, 행위자의 주체적 자각을 향상하고자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내포하고 이를 승화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데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자수 감상에는 기능의 우월성과 예술의 표현성을 초월한 심미 감수성이 작용되어 미적 특질로 수용된다는 점에서 예술적 감응도 깊이가 남다른 것이다.

비록 자수의 공정 과정이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긴 시간이 필요하고, 혼자서 감당하는 작업량이 방대하므로 다수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특수성을 지녔으나, 미적 조형으로서 탐구와 창작은 회화의 조형성이 요구하는 수준과 같은 맥락에 있다. 회화와 동일한 수준의 예술적 안목과 기량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 자수는 다른 공예분야와 달리 기능만을 최우선시하는 인식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창작정신과 신예술 조류의 개념을 전승 속에 융합하여 계승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표현이 자유로운 공예적 특성상 수놓는 제작자의 타고난 기민성(機敏性)과 주관성에 따라 임의로 다양한 미감을 표현할 수 있다. 그림은 흥취에 따라 그릴 수 있으나, 자수는 실가닥을 늘려가며 조형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한 올이라도 부족하면 그 정취의 맛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제작인의 예술 소양이 깃든 공력에 따른 노력과 미술적 조예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자수품의 완성도 수준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이것이 자수의 가치와 그 의의가 기술적 표현성에만 방점을 찍고 기능에만 치우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수조형예술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은 현대의 미술, 공예, 디자인 영역에서 더욱 진일보한 연구와 개척의 여지가 남아있는 영역이다. 자수침법의 결구와 수무늬 규율을 비롯해 자수품의 질료(천연섬유, 자연염색), 문양도안, 미학 등의 지식과 경험은 오늘날 예술디자인 영역에서 모방과 창조, 영감과 계시, 철학과 비전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같은 문화유산을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에 무궁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 현시대의 범세계적 요구에 부응하는 자연환경의 보존, 녹색성장을 추구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예술 산업으로서 향후 무한히 발전가능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 생활에 더욱 풍부한 문화향유를 제공하고 더불어 현대 예술, 디자인 각 관련 산업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우리 문화원형의 발굴과 보존 및 각종 콘텐츠 개발, 스토리텔링의 확산으로 그 가치를 전승하고 확대할 필요가 절실하다.

글+사진‧김영란(한상수자수박물관 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