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6일 오후 일본 해군중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60여 척의 연합함대가 일본 큐슈 북부의 사세보항을 출발했다. 연합함대는 중국 여순항의 러시아해군기지로 향하는 정로군(征露軍)과 대한제국 인천항으로 향하는 한국파견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월 8일 오후 인천항에 도착한 한국파견군 중 육군병력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했고, 치요다[千代田], 아사마[淺間] 등을 비롯한 제4전대의 전함 14척은 팔미도 앞 바다에 정박한 뒤 러시아 전함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그날 밤 여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일본 전함들이 기습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글, 사진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1904년 2월 9일 11시 55분 팔미도 해상
팔미도 너머 먼 바다에 진치고 있던 일본 제4전대 소속 전함들로부터 포격이 시작되었다. 인천항을 출발해서 서해로 나아가던 세 척의 러시아 선박, 순양함 바리야크호, 포함 카레이츠호, 상선 슝가리호를 향한 것이었다. 그날 아침 일본 제4전대 사령관 우리우 소토키치[瓜生外吉]는 러시아 전함에 정오까지 인천항을 떠날 것을 경고하였고, 러시아 측이 교전을 결정하면서 비롯된 전투였다. 이른바 제물포 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약 50분 동안 진행된 양 측의 교전은 수적 우세를 앞세운 일본 함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바리야크호와 카레이츠호는 소월미도 부근으로 돌아와 정박하게 되는데 러시아 해군의 장교와 수병들은 항복할 바에야 자폭하여 명예를 지키자고 결의하였다. 그들은 먼저 카레이츠호의 화약고에 불을 붙여 배를 폭파시킨데 이어 바리야크호에도 스스로 불을 질렀다. 오후 6시 경 두 전함은 완전히 침몰하였고, 상선인 슝가리호마저 불에 타 제물포의 겨울바다에 가라앉았다.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과 미국의 선박들은 침몰하는 러시아 함선에서 선원들을 구조하여 성누가병원 등 개항장 내 의료시설에 수용하였다.
2005년 5월 27일 일본 카나가와현 요코스카시 미카사 박물관
이날 오전 일본의 대표적인 해군기지 요코스카[横須賀] 시의 미카사[三笠] 박물관에 전시된 미카사호 앞에서 러․일전쟁 승전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그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05년 5월 27일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확정지었던 쓰시마해전이 있었던 날이고, 당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제압했던 일본 함대의 기함이 미카사호였다. 그러기에 황인종이 백인종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쟁이라 부르며 일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러․일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장소로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분명 일본인들에게 가슴 벅차고,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제물포 앞바다에서 러시아 전함들이 자폭하자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7천여 명의 일본인들은 앞 다투어 잔해를 건져 올려 기념품으로 삼았다. 인천거류민회에서는 2월 9일을 인천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1930년 제물포해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순양함 치요다호가 퇴역하자 해군성으로부터 이 배의 마스트를 양도받아 자유공원 정상에 세우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국민들에게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러일전쟁’의 기억을 이용하였다. 인천부립도서관이 이전하면서 비어있던 세창양행 사택 건물에 인천의 일본인들이 보관하고 있던 바리야크호와 카레이츠호의 잔해들을 옮겨 전시하면서 이곳을 ‘인천향토관’이라는 이름의 전시관으로 꾸몄다. 한편, 신흥동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지금의 신흥초등학교)의 교정에 바리야크호의 마스트와 포탄을 세워 일본 어린이들에게 전쟁의 당위성을 홍보하고자 하였다. 인천공립심상소학교는 일본인만이 다닐 수 있는 학교였기에 그 교정에 강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러일전쟁의 흔적들을 전시하여 훗날 전쟁에 나가 싸워야할 어린이들에게 군국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레 주입시켰던 것이다.
2010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주한 러시아대사관
당시 인천광역시 송영길 시장이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우리나라에 와있던 러시아의 메르베데프 대통령에게 인천 앞바다에 침몰했던 러시아 순양함 바리야크호의 전함기를 대여해 주는 조촐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그렇게 러시아에 대여된 이 깃발은 러시아 발틱 함대의 해군기지가 있던 생페테스부르크의 해군박물관에 4년 동안 전시되다가 재작년 다시 돌아왔다.
2002년 러시아의 교수 한명이 깃발이 보관되고 있던 박물관을 찾았다. 도록에 수록된 바리야크호 전함기를 비롯한 러일전쟁 관련 유물을 직접 보고 싶다고 서툰 영어로 전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던 깃발을 마주한 벽안의 노교수는 매우 뜻밖의 행동을 취했다. 깃발의 앞에 담요를 깔고 그 위에서 성호를 긋는 등 러시아 정교회의 의식을 취하더니 급기야 목 놓아 우는 것이 아닌가?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야 그 울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러시아의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바리야크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끝까지 적에게 항복하지 않고, 자폭함으로써 러시아의 명예를 지켰던 수병들을 기리는 내용이라 한다. 당시 살아서 귀환한 러시아의 수병들은 러시아에서 영웅의 칭호를 얻었다. 프랑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작가 가스통 루르가 귀국하는 러시아 수병들을 인터뷰한 뒤 간행했던 르뽀의 제목도 제물포의 영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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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통 르루의 르포. 제물포의 영웅들
2004년 2월 11일 오후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연안부두
제물포해전 100주년을 맞아 연안부두의 수변공원에서는 당시 전사한 러시아 수병의 추모비 제막행사가 거행되었다. 당시 수병 875명을 태우고 인천항에 입항한 러시아의 최신예 순양함에는 100년 전 같은 장소에 침몰했던 전함 ‘바리야크’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켰던 당시 수병들의 넋을 위무하기 위해 추모비를 세우려 했던 러시아 측의 입장은 여러 단체와 시민들의 격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100년 전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의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던 목적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인천시민들에게 전사한 러시아의 수병은 일본군 전사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는 절대 건립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반대했던 시민들의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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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발행된 화보주간지 'PUNCH'. 1901년 3월 27일자에
수록된 삽화 "그 발 치워".
러일전쟁의 당사자 러시아와 일본은 각자 자신들의 시각에서 이 전쟁을 기념하고 또 기억한다. 어찌 보면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패전국 러시아도, 전장을 내주었던 중국도 아닌 바로 우리 민족일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우리는 일본이 주도한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빼앗겼고, 그로부터 5년 뒤 결국 나라 잃은 민족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일본의 식민통치는 민족분단,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이에 비추어 볼 때 러일전쟁은 오늘날 우리 민족의 비극을 잉태하게 했던 결정적 원인이었다.
출처:인천시 I-View
http://enews.incheon.go.kr/publish/php/articleview.php?idx=11120§ion=11&diaryDate=2016-02-04&chapt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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