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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는 듣기 힘든 유물이야기 (15)

사랑방 선비의 친구, 문방사우

지금이야 글씨를 쓸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필체가 그 사람의 학식을 나타내던 때가 있었다. 공부를 조금 못하는 사람이라도 글씨를 잘 쓰면 어딘지 모르게 똑똑해보이곤 했다.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 높지 않았던 시절, 한문에 능통하고 필체가 좋으면 ‘면서기’로 특채되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네마다 서예학원이 심심찮게 있었고, 아예 학교에서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글씨를 쓰기위한 도구를 가리켜 ‘문방사우’라 부를 정도로 전통시대 글씨는 선비가 갖추어야할 덕목이었다.

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첫 번째 친구, 붓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도구, 지금으로 말하자면 입력도구가 필요하다. 전통시대 가장 일반적인 입력도구는 붓이었다. 붓은 동물의 털을 추려 모아 나무 관이나 축에 고정시켜 사용하는 것으로 기원전 3세기 중국 진나라의 몽염(蒙恬)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붓이 발명되면서부터 인류는 본격적으로 기록을 행하고 또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간편한 도구인 펜과 연필이 보급되기 전까지 2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필기구로 기능했다.

휴대용 먹물통

일반적인 필기구로 붓이 사용되면서 그에 딸린 기물들도 함께 보급되었다. 그 중 하나가 붓을 꽂을 수 있도록 만든 필통(筆筒)으로 나무, 도자기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표면에 수려한 무늬를 새겨 넣어 단순히 붓을 꽂아두는 용도 외에 장식적 요소를 가미하였는데 이를 통해 기품있는 양반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 외에 붓을 걸어 두는 용도로 만든 필가(筆架)도 있다. 필통이 사용 중인 붓을 꽂아두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라면, 필가는 장시간 사용하지 않는 붓을 걸어두려는 목적에서 제작한 것이다. 오랜 기간 붓을 보관해야했기 때문에 통풍에 신경을 써 해충에 잘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사용한 뒤 먹이 묻은 붓을 그대로 보관할 경우 그 찌꺼기가 굳어버려 더 이상 붓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지 않으려면 붓을 필통이나 필가에 보관하기 전, 먹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어야 했는데 그 용도로 사용되던 그릇을 필세(筆洗)라고 한다. 조그만 항아리로 만들어진 필세는 작은 크기에 주둥이가 넓어 붓을 세척하기에 편리한 구조를 하고 있다.

두 번째 친구, 종이
붓이 글씨를 쓰는 입력도구라면, 종이는 그 대상이 된다. 붓으로 쓴 글씨가 종이에 남아 타인에게 전달되거나,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다. 종이는 기원전 50년 경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고, 서기 105년 후한의 채륜(蔡倫)이 새로운 제지기술을 개발하여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종이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610년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종이 제조 기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이미 종이가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제지기술이 전래되었다고 해도 종이가 대중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지기술이 발달되었다고는 하지만, 종이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에 의해 여러 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지통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던 일반인들은 종이 대신 나뭇잎이나 대나무편 등을 이용했다.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유물이 지난 2005년 계양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되었다. 당시 산성 동쪽의 집수정에서 ‘오각목간’이 발견되었는데, 조사결과 한성 백제기에 해당하는 3~4세기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목간은 나무를 다섯 면으로 깎은 뒤, 각 면마다 먹으로 글씨를 써 놓았는데 글씨의 내용은 논어의 구절로 밝혀졌다. 종이가 흔치 않았던 시절 한번 글을 적으면 재활용이 불가능한 종이를 대신하여 나무 또는 대나무에 글씨를 적었던 것으로, 먹으로 적힌 글씨를 물로 씻어내면 그 면에 글씨를 다시 적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찰통

고려시대 이후 종이의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귀족이나 지식층의 남자들에게 문방사우는 항상 곁에 두어야 할 필수품이 되었다. 책상 옆에는 언제든지 글쓰기가 가능하도록 지통(紙筒) 안에 종이 두루마리를 넣어 두었다. 글을 적은 종이는 이제 기록이 되며, 기록을 보관하기 위해 이를 모아 책으로 편철하였다. 개별 문서의 경우는 접어서 두기도 하지만, 중요한 문서일 경우에는 간찰통에 넣어 보관하였다. 간찰통은 원래 편지를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 구김없는 깨끗한 형태로 전달하기 위해 만든 것이나, 집안에서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 친구, 먹
샤프에 샤프심이 없거나, 펜에 잉크가 떨어지면 글씨를 쓸 수 없는 것처럼 종이와 붓이 갖추어져 있다 해도 먹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먹물은 먹을 물에 개어서 만든 것으로 먹은 선비의 책상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물건이다. 먹은 중국 후한의 서예가였던 위탄(韋誕)이 발명했다고 전해지며, 고구려가 당나라에 바쳤던 조공품 중 먹이 포함되어 있다는 󰡔철경록(輟耕錄)󰡕의 기록으로 볼 때 삼국시대 이미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양산성 출토 목간에도 먹으로 쓴 글씨가 남아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집에서만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산과 들로 유람을 다니며, 그때그때의 정취를 글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야외로 나갈 때 무거운 벼루와 먹을 들고 가야하는 불편을 덜기 위해 그들은 휴대용 먹물통을 사용하였는데 미리 만들어 놓은 먹물을 작은 병에 담아 소지하고 다녔던 것이다. 풍류를 즐겼던 조선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라 하겠다.

벼루함

네 번째 친구, 벼루
먹을 갈거나, 글을 쓰는 동안 먹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벼루는 먹이 없으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먹과 함께 보관된다. 벼루가 처음 만들어졌던 시기는 먹과 같은 중국 후한 때로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고려시대부터 벼루의 사용이 일반화 되어 당시의 무덤에서 석제벼루가 출토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로 만든 벼루가 생산되기도 하였다. 돌이나 자기로 만든 벼루는 다른 문방구류에 비해 깨지기 쉬워서 이를 작은 나무상자에 넣어서 보관하였다. 연상과 벼루함은 벼루뿐 아니라 먹과 붓까지 함께 보관하기 위해 만든 나무상자로 작은 책상을 겸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연상과 벼루함으로 구분한다.

▲ 팔각돌벼루

종이, 붓, 먹, 벼루는 공부방에 있는 네 명의 친구라 의인화하여 부를 정도로 조선시대 선비들은 글쓰기를 즐겨했다. 이를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 서도(書道)라 부르는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서예(書藝)라 하여 예술의 하나로 보았다. 법, 도, 예의 경지에 올랐던 동양의 글쓰기가 이제 기술의 진보에 따라 PC와 스마트폰에 밀려나고 있으니 현대사회의 문방사우는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 그리고 스마트 폰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