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불어닥친 한파로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갔지만 하늘은 맑았다. 청명한 날씨는 하늘을 더 높아 보이게 했다. 지금은 소백산역으로 바뀐 희방사역에 주차하고 첫발을 내디디며 호흡을 내쉬었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 깊숙이 확 들어왔다. 시리도록 차갑다.

하지만 걷기는 언제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 '정신적인 시련은 걷기라는 육체적 시련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걷기는 목적이 아닌 걷는 그 자체에 몰입하게 하는 묘한 힘을 항상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이 걷기에 열광하는 지도 모른다. 이른바 '걷기 열풍 시대'다.

희방사역 입구에 옛길 안내판이 눈에 보인다. 영주시장과 국립공원관리공단 소백산 사무소장 이름으로 된 안내판이다. 오류가 여러 군데 보였다. 기록상 최고의 옛길인 계립령, 즉 하늘재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고, 죽령이 최고의 옛길이라고 몇 군데서 언급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대로 믿을 것 같다. 문화재청에서도 두 곳 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했으면서도 이런 오류에 대해 그냥 두는가 싶다. 무성의인지, 무관심인지... 시정되어야 할 것 같다.

희방사역 철도 옆으로 시멘트로 된 마을길따라 올라갔다. 시멘트길의 연속이다. 그 길이 '죽령옛길로 가는 길'이란 이정표는 계속 됐다. '죽령옛길이 정말 이 길이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단절되기도 한다. 인간은 길을 쉽게 여기지만 길 자체의 속성은 그렇지 않다. 길은 역사를 간직한다. 보존된 길은 수천 년 역사를 대변한다. 인간이 작살낸 길은 인간과 함께 한 역사를 단절시킨다는 사실을 항상 간과하고 있다. 아마 중앙선 철도가 생기면서 필히 단절됐을 것이다. 그 없어진 역사를 복원시키기란 여간 쉽지 않다. 설령 복원했다하더라도 정확한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시멘트길의 끝엔 죽령옛길과 도솔봉 기도원 가는 길로 나눠지는 갈림길이 나왔다. 당연히 죽령옛길 방향이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숲길이다. 가을은 낙엽의 계절이다. 여름엔 녹음이 우거진 길이겠지만 지금은 낙엽으로 뒤덮여 있다. 참나무잎, 낙엽송잎 등이 길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운치다. 낙엽송의 노란 잎들이 길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노란 천연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도시에서 보기 쉬운 은행나무 낙엽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의외로 일본잎갈나무가 많다. 일명 낙엽송이다. 1904년에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안내문구가 보인다.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 이 나무를 통해서도 느껴졌다. 어디서든지 강자의 논리는 통한다. 죽령계곡의 숲에서도 마찬가지다. 구한말 들어온 낙엽송이 기존의 나무를 밀어내고 우점종을 점하고 있다. 물론 한참 뒤 60~70년대에 조림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무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 나무가 들어온 시기와 당시의 우리 상황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죽죽 뻗은 낙엽송들이 죽령옛길의 가로수 같이 늘어서 있다. 가을엔 낙엽송잎들이 길을 가득 채워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
 

늦가을 을씨년스런 날씨지만 죽령옛길의 숲은 우거져 있다. 물오리나무와 물푸레나무, 산뽕나무 등이 낙엽송이 우점종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제각각 군락을 이뤄 자리다툼과 생존경쟁을 하고 있었다. 다래와 으름덩굴은 넝쿨로 터널같이 길을 덮고 있었다. 여름엔 영락없는 천연녹색터널이다. 보기만 해도 시원할 것 같다.

낙옆송이 바람으로 '끼익'하고 소리를 냈다. 키가 30m는 된 듯한 낙엽송이 바람에 살짝살짝 넘어지면서 나무끼리 부딪치며 내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다시 바람을 내고 있다. 바람과 나무는 영원한 공생관계다. 자연은 이 공생을 통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옛 주막터도 나왔다. 과거보러 가는 선비와 봇짐을 든 보부상들이 길을 가면서 쉬어갔을 그런 주막일 것이다. 죽령옛길에 3개의 주막이 있었다고 안내판에 설명되어 있다. 가장 큰 곳이 희방사역 근처에 있었고, 다음으로 느티정주막, 가장 작은 곳이 고갯마루에 주점이 있었다고 마을 향토사학자 송지향씨가 쓴 안내판이다. 하지만 희방사역 근처의 주막은 철로가 생기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느티정 주막도 나무는 없고 겨우 흔적만 찾아 주점과 같이 안내판을 세워두고 있다.

길은 사람을 여러갈래로 나누지만 주막은 모이게 한다. 이 주막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한잔 걸치면서 이런저런 삶의 이야기를 나눴으리라. 지금 우리가 한잔 하면서 나누는 대화를 당시엔 주막에서 하지 않았겠나 싶다. 양반과 하층민이 같이 모였을 그런 주막이다. 주막의 흔적은 없고 석축만 그 역사를 대변하는 듯했다. 흔적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복원의 단초를 찾을 수 있고, 스토리텔링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가니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선생이 충청감사로 온 그의 형 온계를 마중했다는 잔운대와 촉령대, 소혼교의 흔적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형제가 마주 앉아 자연을 벗삼아 회포를 풀었음직 한 곳이다. 이것이 바로 길이고, 역사고, 삶의 흔적인 것이다.

 
<죽령 정상에 있는 죽령주막. 걸쭉한 막걸리를 초가집에서 마시는 옛날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죽령주막 바로 옆에 있는 장승공원. 이곳엔 여러 장승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나그네를 반긴다>
 

마지막 돌계단길을 올라서니 옛 5번 국도가 나왔다. 명승으로 지정된 영주 방향의 죽령옛길은 여기까지다. 이곳엔 장승과 죽령주막이 있었다. 그나마 운치를 살린 흔적이 역력하다. 장승들은 온갖 표정으로 나그네를 반기는 듯했다. 영주시에서 세운 장승들이다. 매년 특징있는 다양한 표정으로 세운다고 한다.

그 장승공원 바로 옆에 죽령주막이 객을 기다리고 있다. 걸쭉한 막걸리에 산채비빔밥이 일미라고 한다. 옛길을 걸으면서 우리의 술인 막걸리를 지나칠 수야 없지. 정말 진한 맛을 내는 막걸리다. 초가집에서 막걸리 마시는 운치도 괜찮은 편이다. 옛길 걷는 또 다른 맛이다.

단양 방향의 죽령옛길은 한국에서 가장 긴 중앙고속도로의 죽령터널에 의해 군데군데 끊어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흔 아홉 굽이를 넘어야 넘을 수 있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죽령옛길, 그 아름다운 길은 우리의 영혼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바로 우리 조상들이 다녔던 우리의 길이고,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과 나무와 산새, 다람쥐 등이 지키고, 우리 선조의 자취가 서린 정감어린 곳이다.

비록 구불구불한 굽이는 찾을 수 없지만 그 이름만 해도 역사가 느껴진다. 아흔 아홉 굽이는 바로 옆으로 지나는 옛 5번 국도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 5번 국도 정상이 바로 죽령 정상이고, 경북과 충청의 도경계이다. 아, 그러고 보니 삼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그런 길이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가 영토확장을 위해 필히 넘나들어야 했던 그런 길이다.

산과 숲과 나무가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역사가 살아 있는 죽령옛길이다. 그 길을 내려오면서 선조들의 느림과 여유의 미덕을 떠올리며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에 젖었다

출처:월간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