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여 점의 유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유물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슴 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 전시장 속 유물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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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우리가 TV나 영화로 사극을 시청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는 하나, 허구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역사적 사실과 극 중의 내용을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인지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사극을 편히 시청할 수 없다. 고증이 잘못되었거나 사실과 다른 내용, 이른바 ‘옥에 티’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기 때문이다.

화약무기의 개발
  인류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과학기술이 향상됨은 물론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체계도 발전해 왔다. 어느 시대이건 새로운 무기는 그 나라의 과학 수준을 대변하며,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전쟁의 역사에서 새롭게 등장했던 무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지금도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지만,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신무기 중 하나가 화약무기일 것이다. 근접 거리에서 칼과 창으로 싸우던 시기에 활과 화살의 등장은 원거리 전투를 가능하게 하였고, 화약을 사용한 화포무기는 전투 거리를 더욱 멀리할 수 있었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원거리에 있는 성곽이나 전함 등의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 화포가 이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 송나라 때 초석(硝石), 유황, 목탄을 원료로 하는 초기의 화약이 처음 개발되었고, 화약을 원료로 하는 무기도 등장하였다. 이러한 신기술은 원나라 때 유럽사회에 전파되었으며,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최무선은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焰硝匠) 이원이라는 사람에게서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하였으며, 1377년 그의 건의로 화약무기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이 설치되었다. 화통도감에서 제작된 화약무기는 당시 우리 해안을 어지럽혔던 왜구의 격퇴에 이용되었고, 세종 때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신기전 등 화약을 사용하는 다양한 무기가 개발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대포를 쏘는 장면이 등장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옥에 티’이다.

화포, 나라를 구하다
  조선 전기 개발된 화포는 내구성이 약했기 때문에 다량의 화약을 사용할 경우 포신이 파열될 위험이 있어 대부분 포탄 대신 화살을 장전하여 발사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제작된 화약무기에는 화포가 아닌 총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총통은 활보다 더욱 먼 거리까지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하나의 총통에서 다량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사전(四箭), 팔전(八箭) 총통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화살 8개를 동시에 발사할 수 있었던 팔전총통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화포제조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포신의 내구성을 강화하여 화살이 아닌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화포가 개발되었다. 당시 개발된 ‘천자총통’ 등의 화포는 여전히 ‘총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화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화포에 장전되는 포탄은 자체 폭발력이 없는 둥근 형태의 철환(鐵丸)이나 석환(石丸)이어서 다수의 인명을 살상하기 보다는 날아가는 힘에 의해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선체에 구멍을 내어 배를 침몰시키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사극에서 놓치기 쉬운 ‘옥에 티’는 여기에도 있다. 적진으로 날아간 포탄이 불꽃, 굉음과 함께 폭발하고 이와 동시에 병사들이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체 폭발력이 없는 당시의 포탄은 인명을 살상할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사극 중 '옥에 티' 한 장면-조선시대의 화포는 포탄이 폭발하지는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은 왜군과 열 번 싸워 열 번을 모두 이길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수군의 전력이 뛰어났던 원인으로 훌륭한 지략을 가진 장수, 용맹했던 병사를 들 수 있겠지만, 조선술·항해술과 결합한 화포기술을 빼놓을 수 없다. 빠른 속도로 접근하여 근거리 전투에 유리하도록 설계된 왜군의 전함과 달리 우리 수군이 보유한 판옥선은 큰 선체에 속도도 느렸지만 화포를 탑재하고 있어 원거리 전투에 유리하였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왜군의 전함이 접근하기 전에 화포를 발사하여 적 함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적은 수의 우리 수군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당시의 화포는 한번 발사한 뒤, 달구어진 포신이 식을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연속발사가 불가능하였다. 우리 수군은 이를 조선술과 항해술로 극복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한쪽 면에서 포를 발사한 뒤 배를 90도로 회전시켜 다른 면에 장착된 화포를 다시 발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리로 사면을 회전시키는 동안 연속해서 화포를 발사할 수 있었고, 아울러 포신을 식히는 시간도 벌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수군이 갖는 최대 강점이었으며, 당시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진도에 나타난 조선 수군의 판옥선-평상시에는 포좌를 나무로 막아두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나무를 걷고 포를 설치한다.

▲영화 '명량'에서 재현한 판옥선과 포혈

강화도를 지켰던 불랑기포
  전함에 탑재되었던 화포의 단점은 조선술과 항해술로 극복할 수 있었지만, 내륙에 설치되는 화포의 경우 발사 후 포신이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단점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러한 단점을 개선하고자 도입한 것이 불랑기포이다. ‘불란서 오랑캐들이 만든 기계’라는 의미를 지닌 불랑기(佛狼機)는 포르투갈에서 처음 개발되어 중국의 명나라를 거쳐 16세기 중엽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불랑기포는 모포(母砲) 1대와 자포(子砲) 5대가 1식을 이루는데 화약을 미리 장전해 둔 자포를 모포에 교대로 삽입해가며 포탄을 발사하였기에 포신을 식힐 필요가 없었고, 연속발사가 가능했다. 다만 포신이 길지 않아 사거리가 짧았으며, 대형화기에 비해 위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크기에 따라 1호부터 5호 불랑기까지 구분되는데 조선에서 주로 제작된 불랑기는 4호와 5호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는 유사시 국왕의 피난처, 즉 보장처(保障處)로 주목받았고, 1679년 강화도 해안을 따라 48개의 돈개가 축조되었다.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全東屹)의 주관 아래 제작된 4호 불랑기포 115문이 강화도 돈대에 배치되었다. 돈대는 바다를 통해 강화도의 해안에 상륙하는 외적의 선박을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쌓은 것이기 때문에 화포의 사거리가 길지 않아도 되며, 큰 위력이 없어도 적선을 타격할 수 있었다. 강화도 해안방어에 있어 불랑기포의 짧은 사거리와 위력이 크지 않다는 단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작고 가벼운 포신은 신속한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어 돈대에 최적화된 화포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불랑기(佛狼機)
1680년, 가로 cm 세로 cm
  1680년(숙종 6) 강화도의 돈대에 배치할 목적으로 제작된 4호 불랑기포의 모포(母砲)다. 자포(子砲) 5대와 함께 1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모포만 남아서 시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포신에 명문이 남아있어 제작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데,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강희(康熙) 19년(1680) 삼도수군통제사 전동흘(全東屹) 등이 강화도 돈대에 배치할 불랑기 115문을 만들었는데 무게는 100근이다. 감주군관(監鑄軍官)은 신청(申淸), 최이후(崔以厚), 강준(姜俊)이다”

 

▲불랑기포에 새겨진 명문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들 기념사진에서 보이는 불랑기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