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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는 듣기 힘든 유물이야기 (11)

인천 사람들의 자존심, 인천은행

전시장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여 점의 유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유물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슴 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 전시장 속 유물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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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지금이야 50층 넘는 건물이 인천에 수두룩하지만, 한때 12층짜리 삼익아파트가 인천에서 가장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 빌딩의 층수가 부를 상징했던 시절이었다. 삼미그룹은 몰라도 3․1빌딩은 코흘리개 꼬마도 알고 있었고, 63빌딩이 최고의 관광코스로 꼽히기도 했었다. 그러던 인천에 1991년 겨울, 20층이 넘는 고층빌딩이 등장하였으니 구월동에 자리 잡은 경기은행 본점 건물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 인천 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이 건물의 외벽에 ‘한미은행’이라는 새로운 간판이 붙어 버렸다.

이전건립 초기의 경기은행 본점건물

인천, 은행을 시작하다.
일본과의 사이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이 개항하면서 통상을 위해 조선에 들어오는 일본인이 많아졌다. 이들의 금융편의를 위해 1878년 일본 국립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되면서 이 땅에도 비로소 근대적 은행업무가 시작되었다.
인천에서의 은행 업무는 1884년 11월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의 출장소가 개설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조선 정부로부터 위탁받은 관세업무를 주로 맡아보다가 상인들의 예적금과 대출업무까지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일본 상인들의 대출업무가 급증하자 1888년 9월 출장소에서 인천지점으로 승격하였고, 한 달 뒤에는 인천지점 관할의 경성출장소가 문을 열었다. 비록 일본 은행이었지만 한 나라의 수도에 출장소를 두고 인천의 지점에서 관할하게 했다는 사실은 개항기 인천의 금융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 개설청원서

1890년대 들어 일본의 제18은행과 제58은행이 인천에 지점을 개설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서양자본의 홍콩상하이은행과 한러은행도 인천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자국민의 통상편의를 도모하였다. 개항기에 개설된 외국계 은행들은 주로 자국 상인들의 통상편의를 위한 것으로 조선인들은 좀처럼 이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 민족자본을 육성하기 위하여 1899년 1월 대한제국 정부는 대한천일은행을 설립하였다. ‘천일’이라는 이름은 일본의 대표적 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을 앞서야 한다는 의미로 고종황제가 친히 붙였다고 한다. 그해 11월 대한천일은행의 인천지점이 싸리재 초입에 개설되면서 인천 사람들도 비로소 마음 놓고 우리 은행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개항기 인천은 5~6개의 은행이 들어서 있던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금융의 중심지였다.

인천은행, 인천 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우다.
다른 도시에 비해 비교적 일찍 은행업무를 시작한 인천이었지만, 개항기를 거쳐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지역 자본을 바탕으로 한 은행은 끝내 설립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어서 일본의 적산은행을 인수한 시중은행의 지점이 개설되었지만, 어수선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지역 은행을 설립할만한 자본도, 인천 사람들의 의지도 부족하기만 했던 상황이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역 경제가 활기를 띠게 되었고, 사회일각에서 지역개발의 동력이 되어 줄 은행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67년 정부가 지역사회 개발자금의 필요성과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해 지역은행의 설립을 추진하고 나서자, 인천에서도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은행 설립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67년 2월 22일 인천상공회의소에서 ‘인천지방은행설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은행설립의 밑그림을 그렸지만, 자본금 구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난항을 겪게 되었다. 대구은행, 부산은행 등 각지의 지역은행이 속속 문을 여는 상황에서 인천은 또 다른 복병을 만나게 된다. 수원의 상공인들이 경기도의 지방은행은 도청소재지인 수원에 두어야 한다는 논리로 인천의 은행설립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사동에 있었던 인천은행 본점건물

당시 인천은 주안염전 자리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있었고, 경인고속도로의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항만을 낀 수도권의 배후도시라는 이점으로 많은 기업들이 속속 인천으로 모여들면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자금줄이 될 은행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러한 당위성을 지속적으로 중앙정부에 개진한 결과, 경기도의 지역은행을 인천에 설립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170명의 주주에게 주식 15만주를 발행하여 자본금 1억 5천만원으로 은행설립 인가를 마쳤다. 은행의 이름은 인천은행, 초대 은행장에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던 이상윤 씨가 부임하였다. 전국 여섯 번째 지역은행인 인천은행의 개점식이 1969년 12월 8일 신포동 키네마극장에서 거행되면서 비로소 인천 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천은행 창립 1주년 기념앨범
1970년, 가로 30.7cm 세로 22.7cm
1970년 11월 30일 인천은행 창립 1주년을 맞아 발행한 기념앨범이다. 은행 설립과정과 연혁을 기록하였으며, 개점식 사진 등 다양한 사진도 함께 수록하였다. 임원 및 주주명단 등과 함께 이상윤 은행장의 감사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당시 주주로 참여했던 고 김재은 선생의 부인, 유조파 여사가 기증한 자료이다.

서서히 무너져 간 인천의 자존심
인천시 중구 사동 2-5번지에 본점을 두고 업무를 시작한 인천은행은 ‘인천 돈은 인천은행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역 내 상공인들에 대한 대출․여신과 시민들의 저축을 통해 영업기반을 다져나갔다. 1970년에는 경동, 동인천, 부평지점과 숭의동, 송림동, 송현동에 현금취급소를 개설하는 등 은행의 외연을 넓혀나갔고, 개점 1년 만에 1,200만원의 순이익을 올려 지역은행 중 5번째인 8%의 배당률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경기도의 유일한 지역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할구역이 인천시 일원으로만 제한되어 경기도민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고, 인천 지역만으로는 영업에 한계가 있다는 내부 판단에 따라 1972년 6월 1일 은행이름을 경기은행으로 변경하였다. 본점은 여전히 인천에 있었고 영업도 인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름을 경기은행으로 바꾼 이상, 인천의 경제활동만을 지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1997년 12월 3일 거듭된 기업의 부도로 야기된 외환부족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IMF(국제통화기금)사이에 구제금융지원에 대한 양해각서가 체결되면서 이른바 IMF 시대가 시작되었다. 경제 분야는 물론 사회 전반에서 구조조정이 실시되었고,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은행권에도 구조조정에 따른 퇴출과 인수합병으로 어수선하기만 했던 시기였다. 퇴출대상은 자기자본 비율 8% 미만인 8개 은행이었는데 경기은행도 그 중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지역은행의 퇴출을 막기 위한 인천 지역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8년 6월 29일 경기은행은 한미은행(현 시티은행)과의 인수합병이 결정되었다. 29년을 이어온 인천의 지역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인천 사람들의 자존심도 꺾이고 말았다.

경기은행 창립 23주년 기념 수저세트

박물관 입사 후 첫 번째로 받은 주문이 경기은행 계좌로 급여계좌를 개설하라는 것이었다. 기존에 거래하던 은행이 있음에도 굳이 경기은행 통장을 사용하라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만든 급여통장은 한미은행을 거쳐 지금 시티은행의 이름을 달고 있다. 47년 전 인천 사람들의 자존심을 담아 만들었던 지역은행이 사라진지 벌써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인천’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은행의 급여통장을 사용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