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방송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전시장에서는 듣기 힘든 유물이야기 (10)

꿈에서도 외어야 했던, 국민교육헌장

전시장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여 점의 유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유물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슴 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 전시장 속 유물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보다. 무슨 과목 시간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 주셨다. 교과서 앞장에 적혀있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오라는 것이었다. 노는 것에 팔려 숙제를 모르는 채 하고 있다가 결국 손바닥 매를 맞아야 했고, 일주일 넘게 손바닥을 맞고서야 간신히 이를 외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국민교육헌장’은 꿈에서도 외워야 했던 힘들고 고단한 숙제였다.

교육의 기본 방향을 세우다
1945년 8월 15일.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닥친 해방은 우리 사회제도 전반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다. 장기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만들어가야 하는 교육제도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어 내선일체화를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민족말살교육을 대체할 만한 교과과정을 단기간에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미 군정시기 교육계는 일제가 만들어놓은 교육과정을 버리고 민족정신과 민주주의의 이념을 불어넣기 위한 우리의 교육정책을 수립해야만 했다. 그러나 6.25전쟁, 4.19의거, 5.16군사정변 등 해방 이후 계속된 민족의 시련 앞에서 국민에게 제대로 된 교육정책을 제시하기란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경제발전과 더불어 국가 운영이 안정화되면서 우리나라 교육의 기본 이념을 정립해야 한다는 사회전반의 요구가 이어졌다. 그에 따라 정부는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의 정립과 시민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총망라한 ‘교육장전(敎育章典)’을 제정하고자 하였다. 1968년 문교부에서 선정한 26명의 기초위원과 48명의 심의위원이 5개월간의 심의를 계속한 끝에 12월 5일 대통령령으로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게 된다.

경향신문 1968년 12월 5일자에 게재된 국민교육헌장선포식 사진

뜻도 모른 채 외워야 했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70~80년대를 학생으로 보냈던 사람이라면 지금도 두 세 구절 정도는 읊을 수 있을 만큼 누구나 암송해야 했던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교가를 모르는 학생은 있어도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는 학생은 없을 정도였다.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이를 암기하도록 강요하였고, 그러지 못한 학생에게는 체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초등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까지도 헌장의 뜻이나 개념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외워야만 했다. 교과서마다 헌장의 전문이 수록되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국민교육헌장 기념비를 세우거나 암송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교과서에 수록된 국민교육헌장 전문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면서 국민교육헌장의 무조건적인 암기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학생들에게 강요되던 국민교육헌장의 암송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매년 12월 5일이면 치러지던 기념행사도 1994년부터 폐지되었다. 정부 공식 법정 기념일로 지내오던 선포기념일도 2003년 폐지되면서 국민교육헌장은 반포 35년 만에 사문화(死文化)되었다.

40년의 시간을 타고 날아온 종이다발
2007년 6월 21일 인천의 제물포고등학교에서는 성덕당 앞에 서있던 국민교육헌장 기념비를 철거하였다. 비석을 쓰러뜨리고 기단의 뚜껑을 열자 그 안으로 세 개의 단지가 놓여있었다. 각각의 단지에는 5~60장의 갱지가 하나로 묶인 종이다발이 10묶음씩 들어 있었는데, 16절지를 반으로 접은 크기의 갱지마다 빼곡한 글씨로 국민교육헌장이 쓰여 있었다. 1973년 7월 당시 제물포고등학교 고 김제동 교장선생이 국민교육헌장 기념비를 교정에 세우면서 전교생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자필로 쓰게 하였고, 이를 반별로 묶어 학년별로 모아 기단 안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학생들의 미술작품을 타일형식으로 만들어 기단의 벽면을 장식하게 하였다.

1973년 세워진 제물포고등학교 국민교육헌장 기념비와 학생들의 기념사진

제물포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던 국민교육헌장 기념비

비석이 철거되는 날, 행사에 참석하였던 이 학교 20회 졸업생 동기회장이 이를 발견하여 보관하게 되었다. 제물포고 20회 졸업생은 비석이 세워질 당시 1학년생으로 동기회장이 친구들의 친필글씨를 기념으로 보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한다. 이 이야기를 20회 동기생 중 박물관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모 선생이 박물관 측에 전해 주었고, 2012년 그의 주선에 따라 제물포고 20회 동기회의 이름으로 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다. 박물관에서는 철거된 기념비가 아직 교정에 남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 측에 문의하여 이를 인수하였는데 아쉽게도 학생들의 미술작품으로 장식되었던 기단부분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하여 박물관에는 1973년 제물포고등학교에서 세웠던 국민교육헌장 기념비와 그 아래에 묻혀있던 1학년생 전체의 국민교육헌장 친필본을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 필사본
1973년, 가로 13.3cm 세로 19.3cm
1973년 7월 9일 제물포고등학교 1학년 전체 학생이 자필로 쓴 국민교육헌장으로 1학급씩 모두 10개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묶음의 표지마다 연도와 학교, 학년, 학급 및 인원수가 표기되어 있으며, 상단 중앙부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 끈으로 편철하였다. 아래 사진의 내용은 제물포고등학교 1학년 9반 6번 이인태학생이 작성한 것이다.

이러저러한 일로 교육제도 전반이 혼란스러운 요즘이다. 모든 초․중등 교육의 초점이 대학입시에 맞춰있고, 중등교사와 수험생의 부모가 아니면 대학입시가 어떻게 치러지는지 모를 정도로 교육의 현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쓰러진 채 교정에 방치되다가 박물관에 온 국민교육헌장 기념비가 오늘날 우리 교육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끝으로 우리 현대사의 일면을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소중한 유물을 기증해주신 제물포고등학교와 제물포고 20회 동기회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