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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는 듣기 힘든 유물이야기 (9)

어느 박물관장을 회상하다, 석남 이경성

전시장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여 점의 유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유물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슴 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 전시장 속 유물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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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2009년 11월 27일 금요일.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쏟아질 것 같았던 오후, 강화도에서 막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경성 관장님이 돌아가셨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낮은 구름의 잿빛 색깔이 선생님의 머릿결을 보는 듯 했다.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도 아니고 가까이 모셨던 관장도 아니었지만, 십수년 간을 박물관 학예사로 살아왔던 나에게 선생님은 스승이나 관장 이상의 의미로 남아 있었다.

2009년 11월 빈소가 마련된 인천시립박물관

인천사람, 이경성
2006년 7월 10일. 2년 4개월간의 확장보수공사를 마치고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 재개관하는 날이었다. 이경성 선생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어느 요양병원에 장기간 입원 중이셨다. 마침 선생의 호를 딴 다목적 공간인 ‘석남홀’의 명명식과 박물관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시장표창이 예정되어 있어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행사에 참석하셨다.
확 바뀐 박물관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선생은 “이만하면 우리 박물관이 국립박물관보다 낫지 않아?”하며 특유의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규모나 내용면에서 국립박물관에 댈 것은 아니겠지만, 60년 전 당신이 만든 박물관에 대한 자부심과 뿌듯함이 묻어나는 그런 웃음이었다.

2006년 7월 10일 인천시립박물관 재개관식에서 공로패를 수여받는 이경성 선생

선생은 뼛속까지 인천사람이었다. 1919년 2월 17일 인천 화평동에서 태어난 그는 1980년대 국립현대미술관장에 부임하면서 출퇴근 문제로 여의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60여년의 세월을 인천에서 보냈다. 서울의 대학에 재직할 때에도 언제나 동인천 삼화고속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고 오갈 정도로 인천을 아끼고 좋아했었다. 시립박물관 명예관장 시절 일년에 서너 번 박물관을 찾을 때면 언제나 꽃게찜과 게장백반을 찾으셨다. 70이 넘은 노구에도 꽃게 몇 마리를 게 눈 감추듯 드시고 게장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서야 수저를 놓으시며 “이 녀석이 밥도둑이야. 이 맛을 알아야 인천사람인게야.”하시며 벙글벙글 웃으시곤 했다. 서구 석남동에 선산이 있어 ‘석남’이라는 호를 붙였다는 선생은 그야말로 진정한 인천사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의 이경성 선생

그토록 인천을 아끼고 좋아했던 선생이었지만, 아쉽게도 말년은 인천과 함께 하지 못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미국에 거주하게 되면서 2006년 9월 딸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던 것이다. 몸은 이역만리 미국에 있었지만 인천과 박물관의 소식을 접하고 싶어 했고, 크리스마스면 트레이드마크인 사람그림이 그려진 삐뚤빼뚤 성탄카드를 박물관으로 보내주셨다. 결국 미국에서 편안히 생을 마감한 선생은 자신이 일군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낸 뒤 경기도 남양주시의 모란공원에 영면하셨다.

미술인으로서의 삶
1954년 3월. 이경성 선생은 9년간의 인천시립박물관 생활을 정리하였다. 미술평론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선생이 미술평론을 쓰기 시작한 것은 1.4 후퇴로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1951년 ‘전시미술전(戰時美術展)’을 관람하고 「민주신보」에 ｢우울한 오후의 생리｣라는 평론을 게재하면서부터이다. 이듬해 3월 「서울신문」에 ｢미의 위도-3․1기념 미술전｣이라는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하였고, 그렇게 시작한 미술평론은 박물관장에 이어 선생에게 미술평론가라는 또 다른 직함을 달아주었다.

▲사람
이경성, 가로 60.3cm 세로 67.5cm
이경성 선생은 미술평론가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림을 그렸던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제나 사람을 그렸는데 “사람이 그리워서, 외로워서 사람을 그린다.”고 했다.

박물관장직을 사직한 뒤 미술에 대한 동경을 실현하고자 서울로 향했던 이경성 선생은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출강하면서 미술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화여대와 홍익대의 교수를 거치는 동안에도 각각 대학박물관장과 미술관장직을 겸임하였고, 1980년대 들어서는 두 번에 걸쳐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직을 맡아 현대미술관의 과천 이전을 무리 없이 추진하기도 하였다.
2001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서울올림픽 미술관장을 사임할 때까지 그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관장이라는 직함이 붙어있었다. 우리나라 1세대 미술평론가로서, 그리고 미술행정가로서 그가 이룬 업적은 너무나 커서 몇 줄의 글로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생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고, 또 선생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함은 바로 ‘관장’이었다.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
이경성 선생이 약관 27세의 나이로 인천시립박물관장에 부임한 것은 그에게 있어 우연이자 행운이었다. 1945년 9월 중도에 포기했던 미술사 공부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립박물관을 찾아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얼마 뒤 인천의 군정관이 국립박물관을 방문하여 일본인들이 인천에 남기고 간 향토관이라는 전시관이 있는데 이를 맡아 운영할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평소 열망했던 박물관을 만드는 일인데다 고향 인천을 위한 일이었던 탓에 별 고민 없이 그해 10월 31일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에 부임하였고, 인천시립박물관은 이듬해 4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인천박물관장시절 박물관 앞에서

7년 6개월 동안의 부임기간 중 실제로 관장 업무를 수행한 것은 전쟁으로 휴관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5년이 채 안되었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선생은 박물관의 기틀을 세우는 한편,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물을 안전하게 대피시켰고, 박물관 건물이 소실되자 그 아래 제물포구락부로 유물을 옮겨 다시 개관하는 등 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였다. 무엇보다 각지에 산포하고 있던 문화유적에 대한 일제조사를 통해 인천의 가치를 찾아내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인천박물관의 근본 사명의 하나인 인천향토사의 완성은 인천 부근에 산재하고 있는 고적조사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믿는다.” 선생이 1949년 인천고적조사보고서에 기록한 글이다. 당시 조사에서 밝혀낸 인천의 문화유적 중 상당수가 현재 인천광역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은 이경성 선생의 혜안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몇 해 전 우연찮은 기회에 이경성 선생님이 박물관장 시절 조사했던 「인천고적조사보고서」를 윤문할 기회가 있었다. 몇 개월 동안 윤문작업을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박물관의 역사와 전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60여 년 전 작성된 먼지 쌓인 친필원고를 직접 윤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짧은 인연을 쌓았던 선생님의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오는 11월 27일이면 선생이 돌아가신지 꼭 6년째 되는 날이다. 올해도 언제나처럼 선생이 잠들어 계시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모란공원을 찾아야겠다.

▲인천고적조사보고서(仁川古蹟調査報告書)
1949년, 가로 26.2cm 세로 17.3cm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실시한 인천고적조사의 결과보고서이다. 인천시립박물관 이경성 초대관장은 1949년 5월 24일부터 10월 24일까지 6개월에 걸쳐 문학산, 청량산, 선미도, 주안, 석남동, 계양산, 서곶에 이르기까지 인천지역을 7개 권역으로 나누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인천지역에서 처음 실시되었던 문화유적 전수조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당시 조사된 유적 중 상당수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