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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는 듣기 힘든 유물이야기 (8)

공간의 경계를 표시했던 돌, 표지석

전시장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여 점의 유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유물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슴 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 전시장 속 유물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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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장거리 운전을 하다보면 “어서오세요. ㅇㅇ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 적혀있는 커다란 표지판을 마주하곤 한다. 운전자는 표지판을 보고 자신이 지금 어느 도시에 있는지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공간과 그 경계를 비교적 손쉽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거리마다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도로표지판 때문일 것이다. 도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이 서있는 공간과 그 경계를 인식했을까?

전통시대의 이정표, 진산(鎭山)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던 전통시대의 사람들은 장거리 이동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당시 먼 곳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이들은 국가의 관리나 보부상 등 몇몇 집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공간과 경계를 인식하는데 사용되는 이정표나 표지판 등의 인공구조물은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공간을 인식시켰던 것은 산이나 강 등의 자연지형이었다. 산이 많은 우리 땅의 지형 때문에 어느 고을이나 산을 끼고 있기 마련이었고, 멀리서 오는 여행자들에게 산은 자신이 어디쯤 와있는지,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인식시키는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고을의 이정표가 되었던 산을 진산이라 하며, 진산은 그 고을의 랜드마크이자 상징적 존재였다. 인천의 경우 부평도호부의 진산은 계양산, 인천도호부의 진산은 소래산이었다.

해동지도 부평부지도에 표시된 계양산(18C중엽)-서울대 규장각

들어가지 마시오. 금표(禁標)
그럼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에게 경계를 명확히 인식시켜야 했던 장소도 있었다. 궁궐이나 왕릉과 같이 신성한 장소나 국방의 요충지 등은 일반인들의 접근을 차단해야 했고, 이를 위해 그 입구에 비석을 세워놓았다. 비석에는 ‘금표(禁標)’라는 글자를 새겨 오가는 사람들에게 들어오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마치 지금 군부대 앞에 서있는 ‘접근금지’ 표지판처럼 말이다.
금표는 소나무 수풀을 보호하기 위해 세우기도 하였다. 전통시대의 소나무는 건축자재나 가구를 만드는 재료로서 매우 유용한 가치를 지닌 나무였다. 나무를 때서 난방을 했던 시절이었기에 마구잡이식 벌목에 소나무가 남아나지 않았는데 국가에서는 각 지방마다 금송군(禁松軍)을 조직하여 무분별한 벌채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세종 때에는 벌목이 금지된 산이 200개가 넘었고, 정조 때는 「송금절목(松禁節目)」이라는 벌목 금지규정을 만들기도 했다.

▲금표(禁標) 및 그 탁본
1733년, 높이 140cm, 폭 67cm
강화전쟁박물관 마당에서 있는 금표와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그 탁본으로 1733년(영조 9) 4월 강화부 관아에 서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중앙의 ‘禁標’라는 명문 좌우로 ‘放牧畜者杖一百棄灰者杖八十’라는 13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때린다.’는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강화부 관아에는 유사시 임금이 머무를 행궁(行宮)이 있었는데 일반인들의 접근과 불법투기를 금하고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금표가 일반인들의 접근을 경고하는 표식이었다면, 강화도 덕진돈대 아래에 서있는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는 19세기말 외국 선박들의 무단 통과를 경고하는 표지석이었다. 비석이 서있는 덕진진 앞의 염하(鹽河) 수로는 서해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해당되는 곳으로 19세기말 근대열강의 침략의 주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병인양요가 끝난 직후인 1867년 조정에서는 프랑스함대의 침입경로였던 염하수로의 초입에 이 비석을 세워 이양선의 무단 통과를 경고하고자 하였다. 비석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10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해석하자면 ‘해문을 막아 지킬 것이니 다른 나라의 선박들은 통과하지 말라’라는 내용이다.

1867년 강화도 덕진진에 세웠던 해문방수비

나라 속 나라, 조계의 경계를 나타냈던 조계석(租界石)
공간과 경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 근대문물이 유입되면서부터이다.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근대국가들은 개항장 내에 자신들만의 공간, 즉 조계를 설정하였다. 조계는 통상을 허용한 영토의 일부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을 허가한 땅을 말한다. 조계는 우리나라가 아닌 조약국의 행정권이 행해지며 치외법권도 인정되었던 나라 안의 또 다른 나라였다.
1883년 1월 1일 개항을 맞이한 인천에는 모두 세 개의 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조계를 설치한 나라는 일본으로 같은 해 8월 30일 ‘인천구조계약서(仁川口租界約書)’를 체결하고, 지금의 중구청 일대 8천평의 부지에 일본전관조계를 설치하였다. 이어 1884년 청국과의 사이에 체결된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으로 지금의 차이나타운 자리에 약 5천평의 청국전관조계도 설정되었다. 그해 10월 일본과 청국을 포함한 7개국과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을 체결하면서 일본, 청국조계를 둘러싸는 14만평의 부지에 각국공동조계가 설치되었다. 조계와 조계, 조계와 조선 영토와의 경계는 그 사이의 도로가 기준이 되었는데 그 경계를 표시하였던 것이 ‘조계석(租界石)’이다.
조계석은 각 조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점에 세워졌는데 사각형의 낮은 돌기둥 각 면마다 ‘○○조계’라는 글자를 새겨 넣어 공간과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시립박물관에는 두 개의 조계석이 보관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당시 각국조계와 인천부의 경계였던 내동 성공회성당 앞에 서있던 것으로 정면과 측면에 ‘각국조계’, ‘조선지계’라는 명문을 새겨 그 경계를 표시하였다.

1884년 제작된 각국조계지도(위)와 내동 성공회성당 앞에 서있던 각국조계석(아래)

한편, 근대적 관세제도가 도입되면서 외국과의 무역항이었던 인천 제물포항에도 세관이 설치되었다. 세관에는 수입물품을 보관했던 창고가 있었으며 일반인들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는데, 이른바 지금의 보세구역과 같은 공간이었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세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그 주위에 표지석을 세워놓았는데 그것이 ‘관지계석(關地界石)’이다. 조계석보다는 조금 높은 돌기둥의 전면에 ‘關地界’라는 명문이 있어 이곳이 세관의 경계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세관의 경계를 표시했던 관지계석

도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사람들은 자연지형을 통해 공간과 경계를 인식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접근을 막거나 경계를 알려야 할 경우에는 돌기둥에 그 내용을 새겨 이를 표시하였다. 소개한 유물 외에도 근대도시 인천에는 이제 그 기능을 상실한 채 방치되고 있는 표지석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지금이야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돌기둥이겠지만, 한때 그 공간이 어떠한 곳이었는지를 알려주는 표지석의 또 다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