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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는 듣기 힘든 유물이야기 (5)

누에고치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던 잠령공양탑

전시장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여 점의 유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유물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슴 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 전시장 속 유물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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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비석으로 보기에는 조금 크고, 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아 보이는 화강암 재질의 길쭉한 돌기둥이 서있다. 고대 이집트의 상징물 오벨리스크를 닮은 이 돌기둥의 정면으로 ‘蠶靈供養塔’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잠령(蠶靈)은 ‘누에고치의 귀신 또는 혼령’ 쯤으로 해석되고, 공양탑은 말 그대로 공양을 올리기 위해 세운 탑이라는 뜻이다. 결국 ‘누에고치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탑’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누가 어떤 의도에서 세웠던 것일까?

서구 가정동 음식점 마당에 서있던 잠령공양탑

음식점 마당에 서 있던 돌탑
2002년이 시작될 무렵 인천광역시 서구 가정동의 한 음식점에 2미터가 훌쩍 넘는 돌탑이 세워졌다. 새겨진 글씨가 아니었다면 그저 장식용 돌기둥으로 보였을 이 돌탑은 음식점의 주인이 1986년 지인으로부터 인수받아 10년 넘게 보관해 오던 것이었다. 담장을 훌쩍 넘는 높이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잘 띠어 장사에 보탬이 될까 세웠던 것이라는데 외려 손님들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탑에 새겨진 한자 중 ‘령(靈)’이라는 글자가 귀신을 뜻한다며 발길을 끊는 손님들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해 3월 음식점의 주인은 이 탑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당초 박물관에서는 이 돌탑이 처음부터 인천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돌탑을 기증자에게 전했던 이가 서구 공촌동에 거주했었다는 사실과 일제강점기 공촌동 일대에 뽕밭이 있었다는 전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잠령공양탑 또는 잠령탑이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역시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던 중 몇 해 전 박물관을 찾은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이순우 소장이 이 탑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잠령공양탑을 처음 세웠던 자리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위치했던 경기도 원잠종제조소(原蠶種製造所)라고 했다. 이어 몇 가지 관련 자료를 박물관에 제공하면서 이 탑이 어떻게 인천까지 흘러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
1926년 11월, 가로 34cm, 세로 45cm, 높이 300cm
전면 중앙에 ‘蠶靈供養塔’이라는 명문과 좌하단에 ‘皐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글씨로 고수(皐水)는 그의 호이다. 후면에는 탑의 건립일자와 ‘設立發起人總代農學博士梅谷與七郞’라는 명문이 있는데 설립발기인 대표였던 우메타니 요사부로[梅谷與七郞]는 당시 경기도 원잠종제조소의 소장이었다. 잠령공양탑은 인간에 의해 명을 다하지 못한 누에고치의 영혼을 달래고, 양잠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돌탑의 유랑, 서울에서 인천까지
원잠종제조소는 일제강점기 양잠업을 장려, 지원하던 기구로 전국 각도에 설치되었다. 경기도 원잠종제조소는 1916년 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리에 설치했다가 그해 12월 동대문구 용두동 138번지 조선시대 동적전(東籍田; 종묘 등에서 제사에 사용할 곡식을 재배했던 국가 직영전)이 있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1926년 11월 경기도 원잠종제조소 구내에 잠령공양탑이 건립되었다. 당시 이 내용을 보도한 매일신보는 “근래 양잠업이 매우 활성화되어 조선에서 소비되는 누에고치가 연간 4백만 섬이나 되는데 그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양잠업에 종사하는 유지들이 뜻을 모아 잠령공양탑을 세우고 공양제를 지냈다”고 건립목적과 주체를 밝히고 있다. 양잠업은 일제강점기 쌀, 면화 등과 함께 수탈의 대상이었다. 군비의 마련을 위한 일제의 수출품목으로 급격한 증산장려가 이루어져 1925년에서 1939년까지 누에고치 100만섬 증수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26년에 세워진 이 공양탑은 시기적으로 보아 일제수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926년11월25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잠령공양탑 건립기사

경기도 원잠종제조소가 1938년 경기도 농사시험장과 함께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벌응절리(지금의 부천시 역곡동)에 새로 조성된 10만여평의 부지로 이전하면서 그 구내에 서있던 잠령공양탑도 1939년 4월 이곳으로 옮겨졌다. 경기도 농사시험장은 해방 후 1962년 경기도 농촌진흥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978년 경기도 화성시로 이전하였다. 당시 잠령공양탑은 부천시 역곡동에 그대로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함께 옮겨졌다면 지금쯤 화성에 있는 경기도 농업기술원 구내 어딘가에 이 탑이 서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탑은 인천 서구 공촌동으로 옮겨졌고, 1986년에야 기증자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원잠종제조소에 세워진 잠령공양탑(붉은색 원)

잠령(蠶靈)에 대하여
많은 근대문화가 그렇듯 잠령에 대한 개념도 일본에서 유입되었다.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는 일본에서 잠령은 ‘양잠을 관장하는 신’을 뜻한다. 아이치현 토요타시에 잠령산이 있고, 그 중턱에 잠령의 위패를 모신 잠령신사가 존재한다. 이 신사에서는 매년 4월 21일과 10월 21일 잠령에 제사를 지내고 양잠업의 풍년을 기원한다고 한다. 요코하마시 이즈미구와 나가노현 오카야시 조광사(照光寺)에는 각각 1896년과 1934년에 건립된 잠령공양탑이 있다. 특히 조광사의 잠령공양탑은 높이 11.2m의 2층 목탑으로 조성되었고, 매년 4월 29일 잠령공양제가 열린다. 두 탑 모두 양잠업과 제사업(製絲業) 관계자들의 모금을 통해 조성된 것으로 희생된 잠령을 위로하고, 잠사업의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또, 일본의 중부와 동북지역에는 매년 2월초에 잠령축제가 열린다고도 한다. 이처럼 일본 곳곳에는 여전히 잠령과 관련된 문화가 남아 보존되고 있다.

▲일본 조광사 잠령공양탑

▲상주잠령탑

‘잠령’에 대한 개념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은 잠사업이 근대산업으로 부각되었던 1920년대부터이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희생된 잠령에 대한 위로와 잠사업의 발전을 위해 잠령공양탑 또는 잠령탑이 전국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생활문화로 남아 보존되고 있는 일본의 잠령문화가 우리나라에 정착되지 못한 것은 다신숭배사상이 주를 이루는 일본과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