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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는 듣기 힘든 유물이야기(1)

쪼개진 비석, 화방공사조난비(花房公使遭難碑)

전시장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여 점의 유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유물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슴 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 전시장 속 유물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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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봄 날 오후에 걸려온 한통의 전화
월드컵이 열리던 해였나 보다. 아직은 겨울 추위가 남아있던 3월의 어느 날 오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남구 문학초등학교 근처 공사장에서 비석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수고스럽더라도 나와서 살펴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종류의 전화는 대개 두 가지 상황에서 걸려온다. 공사 현장에서 갑자기 발견된 문화재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졌으며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문을 구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를 보여주면서 박물관에서 구입의사가 있는지 은근슬쩍 탐색하기 위함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괜스레 피곤해지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기에 적당한 구실로 피했겠지만,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비석이라니 최소한 어떤 종류의 비석인지는 조사해서 알려주어야 했다. 3월이긴 해도 아직은 쌀쌀한 날씨 탓에 귀찮음이 앞섰지만, 주섬주섬 카메라와 옷가지를 챙겨 박물관을 나섰다.

발견당시 비석

비석이 발견된 곳은 남구 문학동 문학초등학교 동쪽 담장 바깥의 다세대주택 신축공사 현장이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한 쪽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비석은 학교 담장 안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터파기 공사 도중 땅 속에 묻혀있던 비석이 발견되었고, 공사관계자가 이를 안전한 장소로 옮긴 후 박물관에 연락해 온 것이었다. 땅바닥에 누워있던 비석은 일반적인 비석과는 달리 폭이 매우 좁았는데, 자세히 보니 양쪽 면이 불규칙적인 것이 일부러 쪼갠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비석을 세로로 쪼개어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발견된 비석은 그 중앙부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단 비석에 대한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관계자에게 비석의 보존을 부탁한 뒤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비석이 묻혀있던 현장에 들어선 빌라

정면에 새겨진 10글자, ‘花房公使一行遭難之碑’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알 수 있는 정보가 상당하다. 그 정보를 최대한 밝혀내어 관람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학예사의 임무 중 하나다. 이 비석의 정면에 새겨진 10개의 한자(漢字)는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우선 여기에 새겨진 ‘화방공사(花房公使)’는 1880년부터 3년 동안 초대 일본공사를 지냈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를 말한다. 다음의 ‘일행(一行)’과 ‘조난(遭難)’은 지금도 사용하는 단어이고, 마지막의 ‘지비(之碑)’는 그 앞의 8글자와 관련된 비석이라는 뜻이다. 이를 조합해서 풀어보면 초대 일본공사를 지냈던 화방공사 일행의 조난과 관계된 비석이라는 말이 된다.

화방공사조난비(전면)

▲하나부사 요시모토

비석이 이야기하는 화방공사 일행의 ‘조난’은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가던 상황을 말한다. 7월 23일 밤 신식군대와의 차별대우에 분노하며 궐기한 조선의 군병들이 서울의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화방공사는 공사관을 불태우고 20여명의 일행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와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칠 셈이었던 것이다. 밤새 길을 달려 이튿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인천에 도착할 수 있었던 화방공사 일행은 인천도호부의 관아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추격해 온 조선 군병들이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인천의 군인들과 합세하여 화방공사 일행을 공격하였고, 일본인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격렬하게 저항하며 도망쳐 월미도를 통해 일본으로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6명이 전사하였다.

비석을 세운 이유
비석의 정면에 새겨진 글자가 비석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정보였다면, 뒷면에 새겨진 글자는 이 비석이 세워진 이유를 알게 해주었다. 한자를 새긴 정면과 달리 뒷면에는 일본어 90자를 새겨 놓았다. 쪼개진 비석의 중앙부분만 남아있어 앞부분과 뒷부분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미야 타로[官周太郞]를 비롯한 6명의 일본인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7월 24일 인천에서 전사한 화방공사 일행 6명의 이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후면에 새겨진 명문

그 뒤로는 인천도호부사 ‘정지용(鄭志鎔)이 대원군에게 소환을 당할 경우 죄를 받을 것을 알고 독을 삼켜 자결하였다’는 내용을 새겨놓았다. 정지용의 자결은 화방공사 일행을 도왔다는 사실을 이유로 조선정부가 그를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정지용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은 대개 우호적이어서 피신을 요청한 화방공사 일행에게 휴식처와 음식을 내주며 환대했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다. 조선 정부가 그를 처벌하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측 기록을 보면 8월 5일 정지용은 일본인들을 보살펴주었던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 나머지 일본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뒤 자결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의 시신을 특별하게 운구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한편, 그에게 한성좌윤을 제수하였다. 만약 비문의 내용처럼 당시 조정에서 정지용을 처벌하려 했다면 그가 비록 자결했다 하더라도 처벌 절차는 그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52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내선일체의 치세가 하늘에 우러를 때 이들 희생자의...’라는 구절이 뒤따르는 데, 이로 미루어 1882년으로부터 52년이 흐른 1934년에 비석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인천에서 전사한 6명의 일본인 뿐 아니라 자결한 정지용마저 이 사건의 희생자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단어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이다. 내선일체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논리로 1937년 중일전쟁 직후부터 조선통치의 슬로건으로 등장한 단어이다. 그러한 단어가 1934년 건립된 비석에 등장한다는 것도 흥미로울 뿐더러 당시 자결한 인천도호부사 정지용을 전사한 6명의 일본인과 동등한 희생자로 대우하면서 내선일체의 사례로 활용하고 있는 그 치밀함이 놀랍기만 하다.

풀지 못한 수수께끼...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통해 비석의 정체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석이 쪼개진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지 못했다. 쪼개진 면이 삐뚤빼뚤 불규칙적이어서 일반인이 정을 대고 일일이 쪼아가면서 조각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집안의 구들이나 주춧돌로 재활용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이라면 굳이 세 부분으로 쪼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혹시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자 누군가가 문학초등학교 옆에 서있던 일본인의 비석을 정으로 일일이 쪼아서 세 조각을 낸 뒤, 땅 속에 묻었던 것은 아닐까? 일제에 대한 분노를 그런 식으로나마 달래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저러한 상상 끝에 도달한 나만의 결론일 뿐이다.

‘화방공사조난비’는 임오군란 당시 일본으로 도망치던 화방공사 일행이 인천에서 잠시 머물렀던 사실을 기념함과 동시에 당시에 전사한 6명의 일본인과 인천도호부사 정지용을 추념하기 위해 1934년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던 문학초등학교 인근에 세웠던 것이다. 2002년 3월 남구 문학초등학교 인근의 땅속에서 쪼개진 가운데 조각이 발견되어 그해 4월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 인수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비석의 크기는 높이 220cm, 두께 30cm로 박물관 우현마당에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