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피아여고 교정
굴곡 많은 근대사 담겨

양림동의 낯선 ‘서양인촌’을 바라보는 달갑잖은 눈길들이 있었을 것이다. 100년 전 광주 최초로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통로가 되었던 이곳에서 선교사들은 토착 광주사람들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극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수피아여고와 여중의 전신인 수피아여학교는 1908년 미국 선교사 유진벨의 사택이 있던 사직도서관 일대에서 몇 명의 여학생들을 가르친 것에서 시작됐는데 미국의 한 부인이 여동생 수피아(Speer)를 애도하고자 기부한 기금으로 1911년 ‘수피아홀(등록문화재 제158호)’을 준공하면서 수피아 여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커티스메모리얼홀(배유지 기념예배당, 등록문화재 제159호)’은 이 학교를 설립한 유진벨(배유지)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1921년 건립, 교육사와 기독교사의 증표가 되고 있다. 현재 수피아여중의 본관으로 쓰이는 ‘윈스보로홀’(등록문화재 제 370호)은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1927년에 준공됐다. 광주 근대문물 유입의 창구인 양림동에 위치한 의미 있는 구조물들이다,
기독교신앙과 신문물을 전파한 수피아여학교의 학생과 교직원들이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적극참여한 것은 민족과 지역에 기여하라는 교육의 결과였다. 유일신앙을 토대로 운영됐던 수피아여학교는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1937년 자진 폐교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 건물과 부지를 몰수당한 수피아여학교는 1947년 미군이 떠난 뒤 비로소 원래의 학교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수피아의 굴곡 많은 역사는 우리 모두가 겪어 나온 역사에 다름아니다.

- 호랑가시나무
재앙은 오지 말고 기쁨만 오시라

겸손한 십자가를 매단 교회와 선교사 가옥들, 낮은 언덕이 커다란 카드처럼 펼쳐진 오래된 마을의 고샅길을 휘돌다 닿은 양림산 기슭. 거기 카드의 장식 같은 호랑가시나무(광주광역시기념물 제17호)가 있다. 두 나무를 가까이 심었는데, 자라면서 붙어 버려 한 나무처럼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의 키는 6m 정도. 아주 천천히 제 안을 채워 가며 400년 동안 자란 키이다.
호랑가시나무로서는 ‘거목’에 속한다. 호랑이 녀석이 등이 가려울라치면 이 가시에 등을 문질러 긁는다 하여 ‘호랑이 등긁기 나무’라 부르던 데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나무. 예수가 가시에 찔려 신음할 때 로빈이라는 작은 티티새가 그 가시를 빼내려고 애쓰다가 제가 먼저 그 가시에 찔려 죽고 말았다는데, 그 로빈이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잘 먹었다 하여 호랑가시나무를 신성시하게 됐다 한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호랑가시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다. 이 나무의 가시를 수문장처럼 내세워 재앙은 오지 말라 하고 기쁜 일만 불러들이려 하는 것. 새해 연하장에 담긴 호랑가시나무의 의미가 그러하다.
발걸음 디디는 자리마다 옛이야기 스민 양림동. 양림동은 공존의 공간이다. 한국과 서구, 유교와 기독교, 전통과 근대가 공존했던 곳. 사직단과 교회 첨탑들이 어색하지 않게 나란히 어울려있고 선교사의 묘역과 효자비와 충견상이 같은 동네에 있는 곳.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를 보듬고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이곳에서 만나는 오래된 과거가 참으로 귀하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