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쪽염색체험관
5대째 쪽일 잇는 판각이네

주검자리마저 이무러운 동네 가운데 고인돌과 뽀짝 잇대어 있는 ‘이상댁’네. 이웃한 담벼락을 벽으로 삼아 양옆으로 돌담을 쌓아 지붕을 얹은 헛간이 야무지다. 돌이 많은 마을이니 맨 처음 밭을 일굴 적, 어미와 아비들은 돌 골라내느라 손가락 마디마디 피가 났더라 한다.

이상댁네 집 모퉁이에는 돌담쌓기 체험장이 있다. 게으른 사람 돌담 쌓는다고, 그리 느리게 쌓아올렸기에 오래 정정한 마을 곳곳 돌담들의 미덕을 알게 하는 공간이다.
구산댁 노정자 할머니와 부부의 연을 맺고 산 윤병곤씨는 일 솜씨가 참으로 단정하였다. 들에서 돌아오는 즉시로 흙묻은 농기구를 씻고 닦고 그리 야물게 단속하더니 창고가 그대로 전시관이 되었다. 그저 하늘바라기로 농사짓던 시절에 요긴했던 용두레며 써레, 풍구, 당그래, 이 집 소가 지녔던 멍에며 워낭도 걸려 있다.
영산강 줄기엔 쪽농사를 짓고 쪽염색을 하는 마을이 많았다. 그 중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고 윤병운 명인의 대를 이어 윤대중·최경자 부부는 5대째 자신들의 몫으로 넘겨진 쪽일을 하고 있다. 비닐하우스에 들인‘판각이네’전시관엔 쪽물 내는 대막가지에도, 쪽 항아리 덮는 멍석에도 쪽빛 물들었다.
서리서리 쟁여둔 이야기 풀어낼 적에 서걱이고 수런거리고 두런거리던 그 날의 기쁨과 눈물들이 되살아나는 곳, 삶의 터전에 아로새겨진 기억의 무늬들이 손금처럼 지문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 한사코 ‘터무늬’를 지워버리려는 세상에서 여기 ‘터무니’를 만난다.

- 이용욱·이식래·이금재 가옥
곳간에, 장독대 문간에 얹은 기와

이 마을에선 길을 잃어도 좋다. 아니 길을 잃는 것이 좋다. 자꾸만 휘어 돌아가는 고샅길은 꼬불꼬불 이어지고 울타리는 대나 싸리울이거나 토담이거나 돌담이고 또 거기엔 담쟁이가 푸르게 덮여 있거나 혹은 서늘한 이끼가 가득 낀 것이 그 중 어느 곁을 걷는다 해도 그 오래되고 고즈넉한 평화의 기미가 스멀스멀 전해질 것이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강동)마을. 앞으로 펼쳐진 너른 득량벌은 일제강점기 1938년 득량만 방조제 건설로 생긴 간척평야다. 그 덕분에 강골마을은 부촌(富村)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 당당하게 이마를 들고 앉은 가옥이 이용욱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159호). 솟을대문이 우뚝 키를 세우고 있다. 다른 집들에선 키가 커진 농기구를 들여놓느라 없애버린 홍살문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
“전통마을의 종가집이 안쪽으로 겸손하게 물러나 앉아있는 데 비해 대표선수인 양 마을 앞자리에 부잣집이 나앉은 것은 물질을 과시하는 근대성의 산물이라는 것”
이 건축학자 한필원씨의 견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옆에 앉은 이식래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160호)은 치맛자락 마냥 물결 모양으로 다듬은 초가지붕의 끝자락이 눈에 순하게 안긴다. 이 집은 사람 사는 살림채엔 초가를얹고, 특이하게 광에 기와를 얹었다. 그만큼 곡식과 농기구를 애지중지하였다는 말이렷다. 득량만 간척지가 완성되면서 생산된 쌀로 부농 마을로 변하게 된 마을의 자취가 담긴 집이다. 이 집에선 장독대 문간도 기와를 얹고 있으니 그 중 누추한 안채 초가 마루가 이무럽다.
이금재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57호)은 안채 7칸, 광채 7칸으로 특히 뒤안이 단아하다. 안채와 광채 모퉁이를 담장으로 막아 외부인이 직접 출입하지 못하도록 한 뒤뜰에는 담장 아래 나지막한 화단이 있고 담장 가운데 작은 문을 나서면 후원. 대숲소리 무성하다.

- 열화정
머슴 의병장 받들던 이의 자취를 기리다

열화정 드는 길은 이용욱 가옥에서 오른편에 있다. 휘어드는 길이 참으로 사랑스런 ‘에스라인’을 이루는 열화정(悅話亭, 중요민속문화재 제162호)은 1845년(조선 현종 11년) 이진만이 지역 동량들을 길러내고자 마련한 정신수양의 도장이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친척들과 정담을 즐기고, 거문고 타고 글 읽으며 즐기니 시름이 사라지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에서‘열화(悅話)’라는 이름을 가져왔다.

일각대문 일섭문(日涉門)에 들어서니 대숲은 울울창창, 축대 위에 높이 앉은 열화정은 연못을 앞에 앉혀 둔 채 적요하다. 난간에 기대어 있다가 누마루에 오래 앉아 있다가 연못가를 서성여도 본다.
아름다운 이의 자취가 깃든 공간이다. ‘보성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하였을 때 그 주먹은 머슴 출신 의병장 안담살이(‘담살이’는 머슴을 이르는 말)의 의분에 내력이 닿아 있다. 담살이였기에 호를 ‘담산’으로 쓴 안규홍(안계홍).
호남의병 중 가장 강력했던 군대인 안담살이 의병의 선봉을 맡은 분이 이관회이며, 열화정은 이관회가 수신했던 곳이다. 봉건적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사회에서 양반의 신분으로 머슴살이하던 담살이 의병장의 수하에 들 수 있었던 사람. 의로운 것을 앞에 두고 상하귀천을 따지지 않은 그에게서 맑게 깨어 앞서간 선각자의 모습을 읽는다.

- 소리샘
마을사람들의 여론 창구

이 마을에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는 곳은 이용욱 가옥 담장 밖으로 있는 우물이다. 이 우물을 내놓으려고 이용욱 가옥은 담장의 일부를 안으로 들여쌓는 배려와 겸손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동네 아낙들 아침저녁으로 얼굴 마주했을 이 공간엔 특이한 구멍 하나가 있다. 이용욱 가옥의 담장에 나 있는 네모난 구멍의 기능은 대관절 무엇일까.
“그 집 양반들이 동네 사람들 주고받는 소리를 듣자고 뚫어 놓은 것이라고 그래.”
이 조그만 구멍이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여론의 창구였던 셈이다. 하여 이 구멍은‘소리통’, 이 샘은 ‘소리샘’이란다. 배려와 소통과 연대의 공동체 정신을 담은 소중한 공간이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