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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암(鄭岩)을 찾아서(4)

인천의 공연 100년

본 연재에서는 1900년대에서 2000년까지 지난 20세기 인천에서 있었던 다양한 공연을 살펴보고자 한다. 연극, 음악, 무용 등 다양한 공연과 함께 울고 웃던 인천인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서 인천에서 있었던 공연으로 지난 세기 인천인의 삶은 물론 한국과 세계의 문화를 생각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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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암(鄭岩)을 찾아서(4)

영화 ‘낙화유수’이후 인천에서 주로 활동하던 정암이 서울의 연극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8년 극단 낭만좌의 공연 ‘햄릿’의 ‘묘지장면’이었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5막 1장을 진우촌이 번안, 각색한 것으로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연극경연대회 참가작이었다.

▲낭만좌의 <햄릿> 연습장면. 「동아일보」, 1938.2.9.

1938년 동아일보사는 전국 규모의 ‘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연극경연대회는 1939년까지 고작 2회가 개최되었을 뿐이었으나 연극계에 미친 영향은 컸다. 우선 무엇보다도 신문을 매개로 대중의 관심이 획기적으로 증진되어 명실상부한 축제로 성황을 이루었고 경연대회라는 도전적 형식 또한 연극계에 크게 자극이 되었다. 그 성과는 일제 말 국민연극경연대회로 이어졌고 해방 후의 각종 콩쿨형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

동아일보 연극경연대회 1회 참가단체는 낭만좌 외에 유치진의 극예술연구회의 슈니츨러의 <눈 먼 동생>, 인생극장의 <안해의 방향>, 화랑원의 <십오분간> 등 4단체의 작품이었고 대상인 단체상은 극예술연구회가 수상하였다. 2회 경연대회는 창작극대회로 대회규정이 바뀌었으며 참가단체는 극예술연구회가 재편된 극연좌, 낭만좌, 중앙무대, 통천 예우극장 등 4단체였다. 이때 극연좌의 참가작이 바로 함세덕의 <동승>이었다. 또한 이채를 띤 것은 동해안 통천, 작은 지방도시의 극단 예우극장의 참가로서 이들은 김북두의 <청어>라는 작품으로 단체상을 수상하였다. 낭만좌의 2회 참가작은 박향민의 <상하의 집>이란 작품으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정암은 여기에서 악덕 집주인을 연기하였다.
1937년 인천을 방문하여 공연했던 극예술연구회는 물론이요 통천 예우극장은 1939년 11월 <청어>와 이광수의 <무정>을 갖고 인천을 방문하니 후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터이다.

1938년 2월 낭만좌 <햄릿>의 ‘묘지장면’
낭만좌는 1938년 1월에 문단과 연극계의 협력으로 창단되었다. 민태규, 안동수, 오장환, 김욱, 김영보, 진우촌, 박향민, 이병현, 서영복, 유일준, 최운봉, 양훈, 박흥민, 변일로, 박연, 조용범, 박학, 김소영, 양숙규, 하영주, 강정애 등 극단 구성원은 당시 유치진이 이끄는 극예술연구회의 경쟁상대로 생각될 만큼 쟁쟁하였다. 이들은 극예술연구회의 서구극 취향과 그 중간적 위치, 일본의 유행작품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고 또한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다. 하여 이들의 공연은 극예술연구회 중심의 평단에서도 대중극 중심의 평단에서도 그다지 우호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낭만좌의 <햄릿>의 작품소개. 빨간선 안 묘굴자 A가 정암이다. 「동아일보」, 1938.2.9.

낭만좌의 첫 공연작품이면서도 연극경연대회 참가작 <햄릿>의 ‘묘지장면’만 해도 현철은 ‘원래도 어려운 작품을 이해도가 떨어지는 대중 앞에서 그것도 한 장면만 보여준 것이 문제’라고 평가했고 또 다른 심사위원 안석주도 ‘극단이 가진 연구적 태도가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된 원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실 이 당시의 심사위원의 안목조차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현철은 낭만좌의 ‘햄릿’의 성격이 영웅적이고 당돌하여 실패했다고 하였다. 서항석은 공연평에서 햄릿의 성격은 본래 유약하다고 하였고 송석하도 공상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유약한 햄릿’, ‘죽느냐 사느냐’ 갈등하는 햄릿이란 성격적 선입견은 극적으로는 명백히 오해이다. 햄릿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결혼한 상황에서 진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막 아버지의 유령의 만나서 상황의 전말을 이해하게 되면서 햄릿은 할 일을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탁월한 행동능력을 보여준다. 햄릿이 움직이지 않고는 연극 <햄릿>은 없다.
요컨대 낭만좌의 작품은 당대적이지 못한 점, 당대의 관극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점이 약점이었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극단이 연극을 상연하면서 대중적 이해와 지지를 우선하지 않았다는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낭만좌의 위상에 대해서 아직 학계의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문화사는 다각적인 방식으로 조명되어야 실체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낭만좌는 무엇보다 이들의 문제의식, 당시 주목했던 문제 자체가 중요한 극단이다.
<햄릿>의 ‘묘지장면’은 바로 그 같은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김욱 연출, 이병현 장치로 정암은 이 장면의 중심이 되는 묘굴자(산역꾼) A를 연기하였다.
5막의 1장은 오필리어가 죽어 장례식을 준비하는 데서 시작한다. 오필리어는 ‘자살’하였으므로 기독교식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것이었으나 왕의 명령으로 신성한 땅에 기독교식으로 예를 갖춰 매장될 수 있었다. 무덤을 만드는 두 명의 산역꾼은 본래 광대로서 왕의 명령, 귀족의 특권에 대해 조소하면서 현실의 불평등을 비판한다.

묘굴자 A : 글쎄, 이것 봐. 가령 여기에 물이 있다고 하세. 알겠나? 여기엔 사람이 있고, 알겠지? 그 사람이 이 물에 와서 풍덩했다면 싫건 좋건 고의로 물에 빠져죽은 거야. 알겠지? 그런데 말일세. 만약에 물에 그 사람한테 와서 덮쳤다고 하면 그는 고의로 물에 빠진 것이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지 않은 자는 제 목숨을 줄인 게 아니라는 말이 되지.
묘굴자 B : 그게 바로 법률이라는 건가?
묘굴자 A : 그렇고말고, 요건이 바로 검시법이라는 걸세.
묘굴자 B : 그렇다면 내가 진실을 가츠려 줄까? 이 여자가 만약에 양가집 처녀가 아니었다면 격식을 차린 매장은 어림도 없었다구.
묘굴자 A : 얼씨구, 제법이신걸. 제기랄, 귀족들은 평민들보다 목매달고 물에 빠져 죽는 일에도 편리하게 되어 있단 말이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버젓한 귀족치고 조상들 가운데 정원사, 도랑치기, 무덤 파기 같은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잖아. 모두들 아담의 직업을 이어받았지.
- 셰익스피어, <햄릿> 5막 1장 중에서

가련한 오필리어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죽음조차 불평등한 현실을 비판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대단히 현실비판적인 것이다. 더욱이 특권을 누리는 왕족, 귀족이라고 해도 그 조상은 정원사, 도랑치지, 무덤 파기 같은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기 마련이고 인류의 조상 아담까지도 땅을 파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으니 혈통으로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어불성설, 언어도단이다.
이 통쾌한 비판의 순간에 햄릿이 등장한다. 햄릿은 클로디어스 왕이 햄릿을 죽이려고 보냈던 영국행에서 그 음모를 간파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친구 호레이쇼와 무덤을 만드는 두 사람과 무덤에서 나오는 해골을 보며 인생무상의 상념에 젖는다.
이때 묘굴자 A는 해골 하나를 들고 햄릿에게 왕의 광대로 현란한 재담을 자랑하던 요릭이라고 소개한다.

▲BBC, 로드니 베넷 연출, <햄릿>(1980), ‘묘지장면’ <햄릿>의 영화는 매우 여러 번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살려 가장 연극적인 형식으로 제작된 것이 BBC의 <햄릿>이다.
광대 A가 햄릿에게 요릭의 해골을 소개하고 있다.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 <햄릿>(1948), ‘묘지장면’
왼쪽의 등을 보이고 있는 인물이 햄릿이다. 이 작품 또한 이후 만들어진 작품에 비해서는 연극적 느낌이지만 BBC의 수평적 카메라와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높은 시점 레벨은 연극에서는 불가능한 영화적 카메라기법이다.

햄릿은 요릭의 재담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모든 사람, 그러니까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해도 흙이 되고 진흙이 되어 술통의 마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이 무덤은 바로 사랑하던 오필리어의 무덤, 햄릿은 새로운 비탄에 빠진다.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즈는 아버지와 누이를 잃게 된 것이 햄릿이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햄릿과 충돌한다. 이들은 결투를 약속한다. <햄릿>의 파국이 결정된 것이다.

<햄릿>이 대중과 거리가 있으며 ‘낭만좌’의 역량에도 버거운 작품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평등한 현실의 비판과 누구에게나 평등한 죽음, 그 너머의 인생무상의 진실은 이 장면의 핵심이며 낭만좌는 바로 여기에 주목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같은 인생의 진실을 직면한 햄릿에게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오필리어를 잃고 클로어디스의 사주를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레어티즈와 결투를 벌이는 햄릿이 유약하고 공상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암의 연기가 특별히 주목받지는 못했으나 정암과 낭만좌의 인연은 1939년에도 이어진다. 1938년 각색을 맡았던 진우촌의 역할이 모호한 중에도 정암의 참여가 이어진 것을 보면 정암의 연기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하겠다.

1939년 3월 낭만좌 박향민의 <상하의 집>
제 2회 동아일보 연극경연대회의 낭만좌 참가작은 박향민의 <상하의 집>이었고 당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각본상을 수상한 후 1939년 3월 13일부터 4월 2일까지 12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낭만좌의 작품 <상하의 집> 소개. 빨간선 안 집주인 박선달 역이 정암이다. 「동아일보」, 1939.3.1.

<상하의 집>은 극단 예술좌이 겪는 사연을 대본으로 극화하여 공연하는 일종의 메타연극이다.
등장인물은 극단 예술좌의 단원들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공연 연습 과정에서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우선 연습실 사용료를 내지 못해 집세 독촉에 시달리고 있고, 후원자를 찾지 못해 공연 성사가 불투명하며, 단원들 간의 연애 문제에, 생계를 팽개치고 연극에 매달리는 바람에 찾아와 고통을 호소하는 가족이 있으며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극단을 탈퇴하는 여배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연습생이 등장한다.

▲<상하의 집> 무대. 상하(上下)란 위, 아래의 의미로 지붕 위의 다락방처럼 꾸몄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푸치니의 <라보엠>과 비슷하지만 좀더 진지하고 어둡다. 「동아일보」, 1939.3.14.

여기에서 정암이 맡은 집주인 박선달은 인색한 수전노로 이들에게 집세를 재촉하지만 결국 아내는 배우와 함께 가출하고 아들 금동이는 배우가 되겠다고 연습생으로 들어간다. 박선달의 절망은 대단원의 핵심이다. 배우들은 박선달이 직면한 현실적 고통과 좌절을 대면하면서도 예술을 포기하지 말자고 서로를 격려한다. 그렇게 연극은 끝나지만 당대에도 이들의 각오와 의지보다는 이들의 침중한 절망을 더 주도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절망이 시대에 원인이 있음도 합의하였다.

이로 보면 정암은 낭만좌에서 주로 중후하면서도 유머가 있는 중년의 배역을 소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진의 의욕이 돋보이는 가운데 기초를 이루는 중견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겠다.
1939년 낭만좌 <상하의 집> 이후로도 정암은 인천에서 계속 연출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더 살필 만한 정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관심이 시작이다. 이후에도 정암의 추적은 계속될 것이다.

글 윤진현 문학박사 wb4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