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에서는 1900년대에서 2000년까지 지난 20세기 인천에서 있었던 다양한 공연을 살펴보고자 한다. 연극, 음악, 무용 등 다양한 공연과 함께 울고 웃던 인천인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서 인천에서 있었던 공연으로 지난 세기 인천인의 삶은 물론 한국과 세계의 문화를 생각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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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암(鄭岩)을 찾아서(3)

정암의 ‘암(岩)은 ’암(巖)‘의 속자로도 본다. 고일이 굳이 ’岩‘을 썼으니 정암이 스스로를 간략하게 혹은 겸손하게 표현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여 정암의 이름은 자주 ’鄭巖‘으로 쓰인다. 상편에서 이미 인용하였던 매일신보의 칠면구락부 공연 기사에서도 ’鄭巖‘으로 소개되었었다. 이후로도 ’鄭巖‘을 더 보게 되겠기에 새삼 지적해둔다.

▲포인극회의 탄생
「조선일보」1934.06.04

▲ 서울 공연 계획
「조선일보」1934.6.21

포인극회(浦人劇會)라니 제물포의 사람들이란 뜻인가 보다. 정암, 진종혁(진우촌), 정법수, 인두환이 주요 구성원이었고 1934년 6월 말 공연을 목표하고 있었다. 이중 정법수, 인두환은 전혀 정보가 없는 인물이니 이들의 행적을 찾아보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 진우촌의 <꿈과 현실>, <검군>이라는 작품은 지금으로서는 어떤 내용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검군>은 사극인 듯하다. 칠면구락부의 <춘향전>에 이어 <검군>이란 작품을 1934년 썼고 이후 <보검>, <왕소군> 같은 사극 작품을 공연하기도 하였으니 진우촌의 ‘사극경향’ 또한 연구대상이라 하겠다. 이들의 사무실은 용동 182번지였다니 지금으로 치면 어디일까?

1934년 6월 21일까지 의욕 넘치는 계획이 보도되고 있으니 만약 고일이 ‘불발되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공연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울과 인천을 아우르는 활동계획을 세우고 공연 레파토리와 장소까지 결정해놓고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니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다. 연극 한 편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하는 산고가 새삼스럽다.

1930년대 중반 성극 <스데반의 죽음>
정암이 인천 내리교회의 신도였다는 사실은 이미 앞서 복혜숙의 회고를 통하여 확인한 바이다. 고일은 정암이 내리교회에서 황용문, 임근수 등과 성극 <스데반의 죽음>을 크리스마스 축하연극으로 상연하였고 이는 JODK에서 방송되기도 했다고 회고하였다. 이는 고일의 저서 『인천석금』이 발간된 시점에서 약 20년 전이라고 했으니 대략 1935년을 전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축하연극으로 ‘스데반의 죽음’을 다뤘다니 이는 다소 의외이다. 보통 크리스마스 성극은 예수 탄생, 산타클로스 등의 소재를 기본으로 하기 마련이다. 구세주의 탄생일이니 축하하는 즐거운 내용이 걸맞지 않는가. ‘죽음’, 순교라니 축하는 고사하고 무언가 역설이 느껴진다.

‘스데반(Saint Stephen)’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이다. 더구나 그는 로마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스데반의 영향력을 시기한 자들은 거짓으로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유언비어를 유포하였고 이 때문에 스데반은 예루살렘 랍비들의 법정에 소환된다. 스데반은 여기에서 대단히 주목할 만한 종교적 연설을 행한다. 그 핵심은 교회를 키우고 과도하게 권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한 데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성서의 해석에는 좀더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하겠지만 대략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신(神)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의자고 땅이 발디딤대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미 신이 만들었는데 미약한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신을 위한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파악된다.
이 구절은 초대형 교회가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변모하여 국가와 정권의 향방을 농단한다는 해석이 가능한 요즘 같은 시절에는 더욱이나 간담이 서늘하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은 하늘과 교회에 대한 이 같은 단호한 해석을 기반으로 사람들이 하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인하는 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맹렬하게 비판하니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배척하였다고 한다. 결국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간다. 그런데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영혼의 구원은 물론 그 죄를 짓는 자들에게 죄를 돌리지 않기를 기원하니 예수가 죽어가면서도 인간이 스스로 짓고 있는 죄를 알지 못하니 용서해달라고 빌었던 모습과 방불할 정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황용문 군이 헤롯왕을 연기했다는 내용이다. 스데반의 죽음을 결정한 것은 헤롯이 아닌데 주요배역으로 헤롯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 작품에서 스데반의 죽음이 이민족의 지배에 의한 순교로 해석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 외에도 지배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의미가 부가되니 정암의 세계관이 비판과 저항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938년에서 1939년까지 함께했던 극단 낭만좌의 궤적과도 일치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마무리짓기로 하자.

그런데 이 작품이 JODK에서 방송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 경성방송국 제2방송은 조선어방송이었고 대략 6시부터 7시까지 1시간 가량은 어린이방송으로 국어(당시에는 일본어), 산술 등 학습 프로그램, 선생과 생도라는 대화 프로그램, 동요, 동화, 동극 등 각종 오락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들 프로그램은 아동문학가, 동화구연가 등 전문가가 진행하였으며 서울 외에도 전국 각지의 아동문화단체가 참여하였다. 당시 신문에 실린 라디오 편성표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내리교회의 <스데반의 죽음>은 1935년을 기준으로 1933년 11월부터 1937년 12월까지 만 4년 이상을 살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고일의 회고는 상당히 정확하니 1933년이나 1938년이라면 약 20년 전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앞으로 1930년대 전체 시기를 조사할 예정이지만 신문에 라디오 편성표가 실리지 않은 날도 있고 편성표에 단체나 내용에 대한 정보 없이 ‘아동극’ 등으로 단순하게 실린 경우도 있어 구체적 정보를 끝내 확인하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재미있는 정보를 몇 가지 확인할 수 있었다. 1937년 현재 인천에는 국악단체로 ‘문아(文雅)구락부’가 있었다. 문아구락부는 JODK에 출연하여 1937년 1월 24일 저녁 8시에 <영산회상(靈山會相)>을, 1937년 3월 17일 저녁 9시에 <평조회상(平調會相)>을 연주하였다. 이 단체는 인천시사에서도 소개된 바 없으니 우리가 찾아내고 기억해야 할 역사가 여전히 미답지로 남아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외에도 한국연극사 최고의 극작가 함세덕의 인천활동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함세덕을 소개하면서 그의 작품으로 <에밀레종>, <낙화암>, <동승>, <암탉>을 언급하였다. 이중 <암탉>은 문맥을 오독하여 진우촌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940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아동극 <닭과 아이들>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을 뿐, 확실한 작품을 알 수 없었다. 또한 이 작품이 <닭과 아이들>이라고 해도 고일이 왜 이 작품을 <암탉>이라고 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1937년 4월 17일 저녁 6시 인천의 꽃섬동인회가 JODK에 출연하여 함세덕의 연출로 아동극 <암닭>을 방송하였다. ‘꽃섬’이란 ‘화도(花島)’의 한글번역이니 화도진을 중심에 둔 작명이다. 함세덕의 생애사실이 인천상업학교 졸업 후, 서울 일한서방에 취업하고 1936년 희곡 <산허구리>로 등단, 1938년 연극 <도념>(후일 <동승>으로 개제)으로 동아연극경연대회에 진출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점을 상기할 때, 함세덕이 등단을 전후하여 인천 아동문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함세덕 연구에 새로운 관점과 대상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함세덕은 한 번 발표된 작품도 계속 다듬고 고쳐 완성도를 높이는 집필습관을 갖고 있었으니 <암탉>이란 역시 <닭과 아이들>일 것이다. 함세덕은 이후 극연좌에서 활동할 때도 <벽공>, <벌채장 기행> 등의 작품으로 라디오극을 방송하였다. <벽공>은 잡지 『삼천리』에 게재한 작품으로 O.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번안한 것이고 <벌채장 기행>은 현재로서는 작품 내용을 알 수 없다.

글 윤진현 문학박사 wb4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