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적성 전투' 격전지 가보니 영락없는 군사지역… 영국군이 중공군 남하 늦춘 가장 성공적 전투로 평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는 6·25전쟁 때 영국군이 중공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를 거듭하던 1951년 4월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대대가 중공군 수만명을 맞아 혈전을 벌였다. 글로스터대대는 부대원 652명 중 59명이 전사하고 526명이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이'적성 전투'는 사흘간 중공군 남하를 늦춰 6·25전쟁 중 가장 성공적인 지연작전으로 평가받는다. 매년 4월이 되면 영국의 참전 용사들이 파주를 찾아 추모 행사를 연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찰스 왕세자·다이애나빈 역시 1990년대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적성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이 중성산(147m)에 있는 칠중성(七重城)이다. 이곳을 지키던 글로스터대대 A중대는 괴멸 상태가 됐다.
이 칠중성을 둘러싸고 최근 군 당국과 문화재청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군이 이 일대 부지(2150㎡)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하겠다고 신청서를 냈는데 문화재청이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문화재청은 칠중성이 삼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적으로 '국가 지정 문화재'이기 때문에 허가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해 발굴 작업으로 국가 지정 문화재가 자칫 훼손 또는 파괴되면 큰 낭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대체 칠중성이 어떤 지역이길래 이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일까.
지난 11일 찾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의 칠중성(七重城·사적 제437호) 유적지. 군(軍)이 만든 참호와 ‘화생방 신호 규정’ 간판 등이 보인다. 칠중성은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져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6·25전쟁 때는 영국군과 중공군이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최근 문화재청이 칠중성 지역에서 6·25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겠다는 국방부 신청을 불허해 양측 간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 원선우 기자
1300년 동안 변하지 않는 군사적 요충지
칠중성은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둘레는 약 800m인데 지금은 상당 부분 소실된 상태다. 임진강 중류 남쪽 연안에 있는 칠중성은 삼국 시대 때부터 고구려·신라·백제가 각축전을 벌인 전략적 요충지였다.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둘러싸고 수도 없이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638년(선덕여왕 7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삼국 통일 시기에는 고구려와 나·당 연합군의 격전지였고, 675년(문무왕 15년) 한반도 패권을 노린 당나라가 칠중성에 주둔한 신라군을 공격했다가 참패했다. 정부는 이런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해 2002년 칠중성을 사적 제437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지난 11일 찾은 칠중성 현장에선 삼국 시대의 역사적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중성산 초입엔 펜션과 주택 등이 늘어서 있어 여느 시골 야산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폭 5m쯤 되는 등산로를 따라 500m가량 올라가니 야트막한 언덕 수준의 산 정상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성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산 정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탁 트인 평야 너머로 임진강과 북한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 정상 주변에는 군용 헬기장, 참호 등 군사 시설이 조성돼 있었다. 과거 성벽의 흔적으로 보이는 둔덕이 있었지만 울창한 수풀에 가려져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적 제437호 칠중성'이라고 적힌 나무 표지판이 아니었더라면 영락없는 전방 군사 지역에 불과했다.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요충지라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육군 관계자는 "칠중성은 임진강 방어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군사분계선에서 10㎞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데다가 이 유역의 임진강을 건너 남하할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고지가 칠중성이기 때문에 전략적 가치는 1300년 전 삼국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한반도 전쟁사에서 고대의 격전지가 현대에도 격전지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육군박물관장을 역임한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 원장은 "강원도 동부전선은 지역이 험준해 병력의 기동과 보급에 불리하므로 결국 한반도의 북쪽 세력과 남쪽 세력은 서부전선의 한탄강·임진강 유역에서 충돌하게 된다"며 "여기서 전투를 벌이면 양측 병력은 지형 특성상 칠중성 일대에 모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싸우기 쉬운 곳에서 싸운다'는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며 "고대인과 현대인은 전쟁 때 같은 전략과 지형 활용 전술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칠중성 주변에서 덕진산성·이잔미성 등 삼국 시대 성의 유적이 다량 발견된 것도 이 일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칠중성 유해 발굴 신중해야"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이 정부 기관에 의해 제동이 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유해 발굴은 사유지에선 땅 주인과 협의 후에, 시·도 지정 문화재의 경우에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장과 논의해 진행했다. 문제는 칠중성이 '국가 지정 문화재'라는 점이다. 현행 문화재보호법 등에 따르면 국가 지정 문화재 발굴 허가권은 문화재청에 있다. 군이 문화재청에 발굴허가 요청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이용석 조사과장은 "2000년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전국 202곳의 주요 전투 지역에 대한 유해 발굴을 16년째 벌이고 있지만 국가 지정 문화재 지역의 유해 발굴은 이번이 첫 사례"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유해 발굴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입장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가 지정 문화재를 발굴하려면 상세한 발굴 방법과 발굴 후 유적 복원 방안 등을 신청 서류에 밝혀야 하는데 '병력 몇명을 동원해서 발굴하겠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적혀 있어 불허하게 된 것"이라며 "국방부가 전문 인력이 참가한 발굴 방안 등을 가져오면 다시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군 당국도 문화재청의 요구 사항을 맞춰 신청서를 다시 제출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고고학 전문가들은 "칠중성 유적은 아직 한 번도 본격 발굴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칠중성 유적은 삼국 시대뿐 아니라 한성백제 시대 유물이 출토될 수 있어 중요성이 큰 곳"이라며 "삼국 시대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대의 역사가 축적된 유적이니만큼 단순 유해 발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한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