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의 현대미

세종 때는 도자기에 상납 관청과 제작 지방의 이름을 새기게 한 것 외에도 국가가 정한 일정한 견본에 의해 그릇을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관청이나 지방이름이 새겨진 그릇에는 한 개씩 인화한 꽃무늬라든지, 작은 꽃이 여러 개가 길게 찍히도록 만든 특수한 도장으로 전면에 무늬를 정성껏 찍고 백토를 넣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급품이다. 같은 도장으로 수 없이 반복해 찍은 것을 인화기법印花技法이라고 하고 이를 인화분청사기라고 하는데, 중국 자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백토분장을 하는 기법은 중국 송나라 도자기에도 있어 한국의 분청사기와 비교되므로 중국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인화분청사기는 한국만의 고유성을 지닌 자기이다.

인화분청사기는 추상적이어서 현대 작가 중에 1974년에 작고한 김환기의 추상그림을 연상케한다. 같은 무늬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인화분청사기와 김환기의 추상그림은 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청사기는 현대인의 미감에도 잘 어울리는 현대성이 담겨있다. 같은 무늬를 반복해서 찍을 때 마음을 비울 수 있었을 것이고 손놀림은 어느덧 신기神技에 이르렀을 것이다.

해학과 익살

당시의 분청사기 작가는 이처럼 추상적 감각만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익살스러움이 넘치고 재해석으로 단순하게 표현하는 재간이 있어 청자나 백자와는 다른 면모가 있다. 이러한 면모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1469년경에는 경기도 광주에 백자가마를 지어 19세기 말까지 국가가 직접 운영했던 관요를 사기소沙器所 또는 분원分院이라고 한다. 『경국대전』에는 전국에서 선발된 사기장 380명이 사옹원司饔院에 소속되어 있다. 사옹원은 왕실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아로서 사옹원의 관리가 광주 사기소에 내려가 그릇의 제조를 감독하였다. 사기소에서 제작한 것은 백자와 청화백자이다. 조선은 유교국가였으므로 오례五禮의 유교적 의식이 중심이었고, 제기로는 은기銀器와 백자가 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분청사기는 토산공물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자 전국의 분청사기 가마는 백자 제작으로 전환하거나 축소되었다. 이때에 제작되는 분청사기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않아 자유분방한 작품과 주저함이 없는 작가정신이 잘 들어난 그릇을 생산했다. 그 중의 한 곳이 공주 학봉리 분청사기 가마터이다. 공주 학봉리 분청사기의 한 종류가 백토분장 위에 철화안료로 물고기를 그린 것으로 분청사기 철화 물고기문 병이 이에 속한다. 이 병의 무늬는 보조문양대가 구획되어 있음에도 보조무늬 없이 중심문양대에 물고기 한 마리와 반대면에는 연꽃을 그렸다. 물고기의 비늘 대신에 당초덩쿨 같은 무늬를 넣었고 유난히 큰 지느러미 장식은 해학적이고 심지어 이국적인 느낌마저 들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