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뉴스=홍석천 기자】흔히들 도자기는 혼의 예술이라고 한다. 수백시간을 불앞에서 온도와 모양을 살피며 흘리는 도공의 땀이 바로 도자기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즉 도공에게는 전통의 아우라가 풍겨난다. 하물며 장인의 경지인 사기장으로 무형문화재에 까지 이른 사람에게는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사기장이란 원래 조선시대 국가기관인 사옹원에 소속돼 사기를 만드는 장인(匠人)을 일컫는 말이었다. 경기도 광주에 관영사기제조장 분원을 두고 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만들게 했다. 이후 이러한 관요(官窯)가 폐쇄되면서 사옹원에 소속됐던 도공들은 문경·괴산·단양 등지로 흩어져 민요(民窯)들이 번창한다.
1월27일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에 위치한 작업장인 영남요에서 만난 사기장 무형문화재 백산 김정옥 선생은 이런 장인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국회의사당 전시회를 준비하는 바쁜 와중에도 반갑게 기자를 맞아준 선생은 7대조 때부터 200여 년에 걸쳐 사기장 가계(家系)를 이어온 집안의 후손이며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이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선생은 유구한 세월만큼이나 굳건한 전통 도자기에 대한 신념을 피력했다.
김정옥 선생은 아직까지도 손이 많이 가는 전통식 발물레와 망댕이 가마를 사용하고 있다.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묻자 김 선생은 “사기장이니 무형문화재니 하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보존할 만한 가치있는 것을 보유한 사람에게 주는 것인데 내 한몸 편하자고 그것을 바꿀 수 있겠나”라고 반문하면서 “몸이 작업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모를까 아직까지는 배운대로 익힌대로 작업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200년된 발물레와 160년된 망댕이 가마는 ‘도민속자료’로 지정됐다. 현재 쓰고 있는 발물레와 가마는 직접 만든 것이다.
만드는 방식만 전통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일년에 여섯 번 정도 불을 지피는 가마에는 100개 안팎의 도기들이 들어간다. 이중 수백시간의 불을 견디며 작품으로 남는 것은 3~4개 정도라고 한다. 자식과 같은 97%의 작품들을 깨뜨리는 아픔을 감수하고 것도 전통에 대한 고집인 것이다.
김정옥 선생은 “가장 한국적인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물레나 가마부터 전통적이어야 한다. 많은 작품보다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통에 대한 그의 고집을 알수 있는 사례 하나. 문경전통찻사발축제 추진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던 7년간 축제에서 가스가마나 전기가마를 일절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문경을 대표하는 전통을 축제로 만들었는데 전기가마나 가스가마를 사용하면 관람객들에게 거짓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김 선생은 “전통가마만을 사용하게 해 참여업체로부터 많은 원망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기에 추진하는 데 고민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
| ▲ 김정옥 선생 작품 '분청철화조화박지문호'(사진/영남요 제공) |
| |
전통에 대한 원칙은 다른 사람에게보다 자신에게 더욱 엄격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태토를 고르고 물레질을 연습했으며 큰 산 두 개를 넘나들며 장작을 구해 가마에 불을 지폈다. 이렇게 쉼 없는 작업을 해온 지도 올해로 벌써 일갑자를 넘어섰다.
김정옥 선생은 1991년 정호다완을 재현해 도예부문 초대 명장이 된 그는 지난 1996년 국내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 사기장으로 지정됐다.
1999년 문경대학 초대명예교수에 이어 2000년 대통령 표창까지 받는 영예를 얻었다. 지난 2012년 6월에는 통일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통일 후 필요한 재원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통일 준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통일항아리’를 완성하기도 했다.
총 6개로 만들어진 통일항아리는 청와대, 국회, 통일부, 민간단체 ‘통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각각 한 개씩 전달되고 나머지 두 개는 통일부가 보관하고 있다.
외골수적일 만큼 전통 고수에 힘쓰는 김정옥 선생은 요즘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함을 느끼곤 한다. 가업이 자신의 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인 김경식 씨 뿐만 아니라 손자인 김지훈 군까지 가업에 뛰어들어 9대 도예가문이 된 것이다.
그는 “우리 집안이 유일하게 조선 도예의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점이 늘 자랑스러웠다”면서 “도예에 인생을 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자긍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선생을 세상에 알린 작품들인 ‘청화백자팔각병’과 ‘분청사기철화당초문계룡산호’, ‘정호다완’ 등에서 수사적인 기교 대신 투박하지만 고고한 자연의 멋이 느껴지는 것도 이같은 이유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