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옆으로 늘어선 고송(古松)들의 의전(儀典)을 받는다. 즐비하게 늘어선 키 큰 소나무들은 그 푸르름으로 소수서원을 향해 입장하는 사람들에게 공손히 예(禮)를 갖추고 있다. 소나무길을 걷는 동안 그 옛날 내가 이곳에 방문했다면 ‘어서 빨리 책을 펼치고 싶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서원의 아름다운 경관이 도시에서 채 내려놓지 못하고 온 나의 무거운 짐조차도 편안하게 내려놓게 하니, 오래전 학생들의 서원을 향하는 발걸음 역시 가벼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순간, 우리 아이들의 무겁기만 한 등하교길이 떠오른다. 어쩌면 자발적이고도 의욕적인 학문탐구로서의 공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공부를 그저 의무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아름드리 피어난 꽃들과 탁청지(濯淸池) 연못을 둘러본다. 마치 고른 크기로 인절미를 썰어 촘촘히 올려놓은 듯, 죽계천의 돌다리가 정감 있게 느껴진다. 성현들의 멋스러움을 느끼며 자연스레 시 한 구절 읊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게 하니, 어쩌면 고된 학업으로 인한 지친 마음을 이렇게라도 달래보라고 권유한 방법은 아니었을까? 오래전 이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도 과거를 준비하며 글공부에 매진하면서도, 도포자락 휘날리며 사뿐사뿐 돌다리를 건너기도 했을 것이며, 한가로이 탁청지 연못을 둘러보면서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한가로운 쉼표의 시간과 여유로운 공간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아직 생각이 여린 아이들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우정을 밀어내고, 그저 무한경쟁의 대열 속에 내몰려 과연 청소년기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가슴 한 켠에 남겨질 자리는 있을지 싶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至樂齋),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연구하는 학구재(學求齋),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日新齊),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直方齋)로 구성된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거치면,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가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고 한다. 지혜로운 우리의 조상들은 이때부터 맹목적 주입식 교육이 전부가 아닌, 지덕(知德)을 겸비한 전인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던 것이리라. 참다운 공부에 대한 의미를 깨우치는데 주력하면서도 이에 못지않게 내적인 수양도 중요시 여기며 내면의 힘을 바르고 올곧게 키우는데 애썼던 마음이 돋보인다. 복잡했던 현실의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자성하는 마음을 이끌어내며, 서원을 거닐고 있던 내내 평온함으로 어지럽게 담아두었던 생각들마저 정돈되도록 도와준 서원이 내 영혼의 안식처처럼 느껴진다.

노거수(老巨樹)가 우거진 틈 사이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푸르름 속에 옛 선현들이 담고 있던 소중한 의미를 되새기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아름다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꿈꿔본다.

글·사진 고미령(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 26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