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동맹국을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해 전 세계적인 선심 경쟁에 뛰어들었다. 특히 미국은 신생독립국에 직접 식량을 원조하는 것 뿐 아니라 농업 기술 원조에도 공을 들였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아시아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농업의 성장이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면 빈곤층이 늘어나 사회가 불안해지고, 결국 공산주의 운동의 기반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 미국 개발론자들의 우려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60년 미국의 주도 아래 필리핀에 동남아시아 쌀 연구의 전진기지인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설립됐다. 국제미작연구소가 역점을 둔 신품종들은 잎과 줄기가 짧고 빳빳해 질소비료를 듬뿍 주어도 웃자라 쓰러지지 않도록 설계됐다. 그 중 가장 먼저 보급된 IR8은 ‘기적의 벼’로 불리며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쟁 중의 남베트남 정부는 체제 우수성을 선전하기 위해 접경지역에 IR8을 일부러 집중적으로 심기도 했다. 그런데 이 IR8의 개발에 참여한 한국인 농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국제미작연구소에 연수중이던 허문회였다.

통일벼와 한국의 녹색혁명

허문회는 IR8의 육종에 참여하면서 그와 같이 키가 작고 줄기가 튼튼한 품종이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IR8은 인디카 품종(남방벼)이었으므로 그대로 한국에 도입할 수는 없었다. 허문회는 2년의 연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재배할 수 있는 IR8의 후예를 개발하는 데 열중했고, 결국 IR8과 추위에 잘 견디는 일본 홋카이도 품종, 키 작은 대만의 재래 품종 등을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품종은 한국에서 ‘통일’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고 1971년부터 농가에 보급되었다. 통일벼는 한국에서 재배하던 어떤 기존 품종보다도 월등한 수확량을 자랑했지만, 인디카 품종의 후예였으므로 차진 밥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는 그 밥맛이 다소 미흡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쌀의 절대량이 부족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밥맛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통일벼의 보급 전에는 돈을 주고도 쌀을 구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지만,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재배되면서 쌀의 공급은 차츰 원활해졌다.

전국적으로 쌀 생산은 꾸준히 늘어나서 드디어 1977년에는 쌀의 국내 총 생산량이 수요량을 앞지르게 되었다. 정부는 이에 ‘녹색혁명 성취’를 선포하고,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벌였다. 비록 이듬해인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 동안 내리 병충해와 냉해 등으로 수확량이 줄기는 했으나, 1970년대 녹색혁명을 거치면서 높아진 농업생산성은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 통일벼가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도 쌀이 다시 부족해지는 일은 없었다.

삶의 애환이 담긴 ‘정부미’

쌀의 절대량이 부족했던 시대가 지나자 통일벼의 시대도 함께 저물어 갔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중산층 이상의 소비자들은 쌀값 지출을 조금 늘리더라도 품질 좋은 쌀을 선택했다. 때로는 맛좋은 쌀에 대한 욕구가 과열되어 가짜 경기미가 비싼 값에 거래되는 일도 있었고, 미군 부대에서 빼돌린 ‘칼로스’와 같은 미국 쌀이 유통되는 일도 있었다.

반면 대다수 서민들은 ‘정부미’에 의지했다. 정부미는 추곡수매를 통해 확보해 일정기간 비축했다가 시중에 출하하는 쌀을 말한다. 통일벼의 전성기에 추곡수매는 거의 전량 통일쌀이었으므로, 1980년대의 정부미는 대부분 통일쌀이었다. 장기 비축한 통일쌀은 쌀값 안정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자포니카계 햅쌀과 밥맛을 겨룰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결국 정부미는 ‘맛은 없지만 값이 싸서 먹는 쌀’이 되었고, 지금은 어려웠던 옛 시절을 상징하는 낱말이 되고 말았다.

농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식어 가는 가운데, 사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다. 현재 풍요롭기 그지없는 한국 사회지만 정부미 소비를 권장하던 시절, 그리고 쌀 소비를 줄여 보기 위해 혼분식을 강제하던 시절이 불과 삼십년 전이라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글 김태호(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