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이 남겨놓은 과학적 업적과 유물들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거나 과장되게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은 경계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과학유물들과 문화유산 중에서 그 우수성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해그림자를 구면에 투영시킨 ‘앙부일구(仰釜日晷)’, 세계 최초의 우량측정기인 ‘측우기’, 금속활자 ‘갑인자’, 과학적인 문자체계인 ‘한글’의 발명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수준 높은 인문적 교양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이 과학유산들은 세종대 과학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 뿐 아니라 과학기술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활용하는 깊이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안목은 기본적으로 당시대 과학기술자들의 ‘문화적 능력’과 ‘인문적 교양’의 수준을 드러낸다. 즉 당대의 과학자들은 인문적 교양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을 단지 그 자체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 맥락과 실용적 차원을 고려하면서 이해하고 연구했던 것이다.

혁신과 문화창조의 본보기, 애플의 성공요인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그리고 최첨단의 기술을 보유한 우리 기업들에서 세종 시대와 같은 ‘혁신성’과 ‘문화의 창조’를 이루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까? 해방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은 발전을 거듭해 최근에는 그 수준이 세계적 반열에 이른 분야도 많다. 특히 기술과 산업 분야에서 한국의 기업들은 첨단의 제품들을 내놓으며 세계시장을 장악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세계의 여러 기업들 중에서 현대인의 삶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기업을 하나 꼽으라면 자신있게 한국의 기업들을 선정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작금의 시점에서 혁신을 통해 문화를 창조하는 기업을 하나만 뽑으라고 하면, 아마도 미국의 애플이 수위로 꼽힐 것이다.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설립한 애플은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해 대중화시켰으며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만들어 현대인의 문화생활의 새로운 포맷을 만들고 활력을 부여한 기업이다. 애플사가 개발한 개인용 컴퓨터는 이제 현대인들에게 생산과 소비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 되어버렸다. 또한 아이폰의 출시 이후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스마트폰은 통신과 음악, 영상문화과 정보검색, 쇼핑과 금융 등 생활과 문화의 모든 요소들을 자그마한 단말기 속으로 통합시켰다. 애플이 만든 혁신적인 제품들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을 혁신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애플은 어떻게 해서 혁신적인 제품들을 계속 출시하면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가 있었을까?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 혁신적인 제품들을 거듭 만들어내며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애플의 본질 속에는 기술(Technology)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문교양(liberal arts)과 함께 결합해 존재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이 말은 한국의 기업들에게, 그리고 한국의 대학들에게 상당히 많은 점을 시사한다. 기억해보자. 애초 아이팟의 기원이 된 MP3 플레이어는 한국의 기업인 새한정보시스템(MP맨닷컴)에 의해 발명되고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애플은 이것을 단순히 ‘음원을 재생하는 기계’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음악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구현했다. 즉 애플은 MP3를 새로운 ‘문화적 혁신의 도구’로서 발전시켰던 것이다.

혁신과 문화창조의 조건, 과학기술과 인문교양의 결합

앞서 살펴본 세종 시대에 이루어진 혁신과 애플의 혁신에서 보듯 새로운 문화 창조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나의 가르침을 말해준다. 그것은 과학기술을 단지 과학기술 그 자체로서만 이해해서는 발전에 한계가 있으며, 과학기술이 인문교양과 결합되고 융합되는 가운데에서 혁신과 문화창조의 계기가 도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적 능력은 단기간에, 혹은 계획적으로 배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의 문화적 능력은 ‘기술혁신 계획’이나 ‘경제발전 계획’ 같이 계획에 의거해 발전되거나 자원을 투입한다고 해서 곧바로 효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문화적 능력은 오랜 시간에 걸친 인문교양 교육이 진행되어야만 배양될 수 있고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 선진국들은 이런 점들을 인식해서 이미 초·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 나아가 사회교육 차원에서 인문교양 전반을 강조해왔고, 과학기술은 인문교양과 융합되어 교육돼왔다. 이에 비해 한국은 그동안 중등학교와 대학에서 이공계-인문사회계 교육을 분리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기능적인 관점만을 강조했다.

세종 시대를 포함한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19세기 이전까지는 문학과 역사, 철학과 과학의 분야의 학문들이 융합적인 형태로 존재해왔고, 후세대들에게 통합적으로 교육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통합적 학문체계와 교육체계 아래에서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자들은 인문적 교양을 기본적으로 지닐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과학기술과 인문교양이 결합되어서 기술적 혁신을 이루어내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역사적 경험들이 과거로부터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기술의 혁신적 발전과 이를 통한 새로운 문화의 창조는 우리 한국의 과학기술계, 나아가 한국 사회가 이루어내기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니다. 한국에는 과거에 그것을 이루어낸 경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사회와 대학에서 인문교양을 강조하는 풍토를 회복하고 교육을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개선하는 작업을 먼저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후세에 길이 남을 과학유산을 탄생시켜 선조들이 누대에 걸쳐 이룩한 창의정신을 이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 박권수(충북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