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근현대적인 과학기술의 발달은 먼저 서양에서 일어났다. 17세기에 유럽의 몇 나라가 앞장을 서서 과학이 눈부신 발달을 시작했고, 곧 이어 18세기부터는 기술이 놀라운 속도로 세상을 바꾸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앞장선 서양이 세계를 정복해 식민지 시대를 만들어간 것이 19세기였다. 동아시아 세 나라 가운데 일본은 서양을 잽싸게 익혀 식민지 대열에 끼어들었지만, 중국과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울분 속에서 그 역사를 돌이켜 보고 그 과학적 유산에 눈떠 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측우기의 발명 과정을 되새겨 보자. 1441년(세종 23) 4월 26일 『세종실록』에는 ‘길바닥 물(潦水)이 누르러 사람들이 누런 비(黃雨)가 내렸다고 여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예조도 의정부에 황우라 보고했고, 이에 따라 마침 온양온천에서 요양 중이던 임금에게도 그렇게 보고되었다. 그런데 임금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서신으로 세종의 행궁(行宮: 온양에 있던 임시 궁궐)에 다른 해석을 알렸다. 그것은 누런 비가 아니라 송화(松花) 가루가 밤사이에 내린 비에 섞였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증거로 궁궐 안의 그릇에 내린 빗물은 누렇지가 않았고, 또 누런 빗물을 맛보니 물에 송화가루를 섞어 만든 씁쓸한 물맛과 같았다며, 부왕 세종에게 누런 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 편지를 받은 세종은 비가 내린지 이미 며칠이 지났으니 이 보고만으로 정부의 황우 보고를 부정하기 어렵다며, 사람들을 서울로 보내 다시 조사를 시켰다. 사흘 뒤 그 결과를 보고받은 다음에서야 안평대군이 옳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으로 당시 실록(4월 29일)은 전하고 있다. 세종 시대 자연 현상을 두고 벌어진 과학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 측우기 발명이 설명되어 있다.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올 때마다 땅을 파보고 빗물이 스며든 푼수를 재어보았는데, 그 정확한 푼수를 알기 어려워 구리를 부어 만든 그릇에 물을 받아 그 푼수를 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자, 즉 후일 문종(文宗)이 측우기를 처음 발명했음을 가리키는데, 측우기는 1441년 4월 이전에 당시 세자가 처음 고안했던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재이(災異)에서 과학유산을 창조하다

지금부터 거의 6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은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해 지금과는 크게 다른 정도의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가뭄이나 홍수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민감했다. 또 비에는 붉은 비, 누런 비도 있으며 때로는 벌레가 섞여 내리는 비도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요상한 현상은 하늘이 임금에게 주는 정치를 잘 하라는 경고라는 생각이 강했다. 모든 자연의 이상(異常) 현상은 바로 하늘이 내리는 재이(災異)라는 사상이었다.

1441년 온천에서 휴양 중이던 세종과 그 신하들이 누런 비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던 정황은 바로 이런 재이사상 때문이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에 관련된 재미있는 사건도 이런 당시 사상을 조명해 준다. 우리 전통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기록된 ‘태종의 비(太宗雨)’가 그것이다. 왕위에 올라 18년을 통치한 태종 이방원(1367~1422)은 1422년 5월 10일에 죽었다. 재위 시절 가뭄이 잦아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는 자기가 죽으면 그 날이나마 비가 오도록 탄원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 때문인지 해마다 5월 10일에는 비가 내렸고, 그것을 ‘태종의 비’라 불렀다는 기록이다.

측우기나 태종우 등은 모두 조선시대의 재이사상과 관계가 있다. 임금은 하늘의 명을 받아 이 세상을 다스리며, 하늘은 그의 잘잘못을 자연 현상을 통해 경고하고 견책한다는 생각(재이론)은 정치 지도자들에게 하늘의 뜻을 읽도록 하는 노력을 요구했다. 그 결과 태종우의 전설도 나오고, 측우기도 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국보 제2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는 태조 때의 것이지만, 그것이 세종대에 다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또 세종은 경회루 연못 둘레에 보루각(報漏閣)을 세워 자동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또 흠경각(欽敬閣)에는 옥루(玉漏)를 세웠으며, 간의(簡儀)라는 천문관측 기구, 그 옆에 태양고도 관측을 위한 동표(銅表)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휴대용 물시계와 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의 해시계 등도 여럿 발명했다.

우리 과학에서 발견된 창의정신

문익점(1329~1398)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얻어왔다는 일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선조들은 기회가 있으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했던 노력이 여러 길목에서 눈에 띈다. 특히 17세기 이후 서양 선교사들이 북경에 자리잡고 있을 때에는 여러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를 만나 새로운 지식을 배워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홍대용(1731~1783)의 북경 방문을 들 수 있다. 1765년 북경에 갔던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나 필담하며 서양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혔고, 그리 연마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구 자전(自轉)과 우주 무한(無限)을 주장했다.

세종대의 임금과 신하들, 그리고 홍대용 같은 학자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탐구정신과 호기심, 그리고 비판적 태도는 모두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그런 태도가 연면히 흘러오며 우리 선조들의 창조적 성과는 나온 것이다.

서양에서 현대 과학기술이 먼저 발달하게 된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그들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방 경쟁의 세계로 바뀌며 새로 등장한 중산계층 또는 부르주아 계층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과학의 탐구에 열중했다. 그러면서 그런 자극이 사회의 변동을 가속화시키고 때로 혁명을 통해 민주화 과정을 거쳤다. 18~19세기 동안 서유럽 나라들의 급격한 사회변혁과 과학기술 발달은 궤를 함께 했다 말할 수 있다.

현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과학기술이며, 그것은 사회구성체의 창의성에 따라 발달하기도 하고 정체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저 높은 곳을 향하려는 욕구를 잃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는 세상’이 갈수록 위축되기만 한다면, 그 세상에서 과학기술이 발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종대에 과학기술이 크게 융성했지만, 그 후 조선 사회는 양반 지배의 철저한 신분사회로 고착되면서 사회의 창의성이 위축일로를 걸어갔다. 우리 과학 문화유산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국민의 창의성을 높여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글 박성래(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