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정서 닮은 신파와 변사극

10여 년 전 주말이면 집집마다 가족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명화극장’, ‘주말의 명화’ 등 외국영화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다음 날이면 아이들이 또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어제 봤던 영화의 장면들을 이야기하며 더러는 서부극 총잡이가, 더러는 전장의 용사가 되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런 유성영화와 달리 변사는 무성영화에서 빛을 발한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영화 상영에 앞서 영화를 요약해주고 이해를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하다가, 영화가 시작되면 배우들의 대사를 읊어주고 영화 해설까지 더해주는 사람이었지요. 당시에 영화 감상을 위해서는 변사가 꼭 필요했었죠.”

변사 최영준은 “영화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신파극이었고, 신파야말로 우리 민족의 예민한 정서를 건드려주는 매력이 있었다”며 자신도 어려서부터 접한 여성국극, 변사극들을 보고 그 안에 있는 신파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처음부터 변사극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연극배우, 개그맨, 가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어느 날 모 백화점 강당에서 변사 신출 선생의 공연 <이수일과 심순애>를 보고 이 변사극이 마치 피부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시도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직접 부딪혀 보기로 하고 무성영화 필름을 구하고 편집하는 일, 대사를 작성하고 배경 음악을 만드는 일 등 하나하나 손수 작업해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변사라는 직업은 이제 그의 명함에서 가장 앞에 쓰여 있다. ‘한국무성영화발전소 최영준’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무성영화와 변사극에 대한 문화적 재조명이 필요

변사는 1900년대 초에 이 땅에 활동사진이 들어온 이래, 무대 앞에서 장면과 장면마다 해설을 더하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관객들에게 큰 즐거움을 준 존재였다. 극장 앞에 써 붙인 변사의 이름을 보고 입장할지 말지 결정할 정도였고, 청중들은 변사의 말 한 마디에 울고 웃으면서 고달픈 생활의 시름을 달랬다. 이에 일제가 주목한 것은 당연지사. 영화 검열과 동시에 변사에 대한 감시도 이루어졌다. 당시 신문에서는 ‘경성(서울) 안에 있는 변사 24명이 활동사진 변사시험 청원을 경기도 경찰부에 제출했는데, 시험에서는 먼저 품행에 대한 엄중한 조사를 통해 그중 불량한 자는 용서 없이 낙제시킬 것이며, 다음으로 구술과 기타 상식 시험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22. 6. 1). 영화의 흥행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던 변사는, 1930년대에 들어온 유성영화에 차츰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해 해방 이후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무조건 시대에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잊고 지내온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을 영영 되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무성영화 <아티스트>라는 작품이 오스카상을 받았잖아요? 요즘 우리들은 무슨 분야든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하던 나머지 오히려 창조의 결핍 시대에 살고 있어요. 과거의 우리 유산을 찾아보면 새로운 생각,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는데 그런 수고는 잘 하지 않는 듯해요.”

오늘의 시선으로 과거를 떠올려보고, 잊고 지냈던 소중한 우리 유산의 가치를 재생시킬 수 있는 무성영화야말로 온갖 자극적 효과로 가득한 유성영화에 지친 현대인에게 좋은 대안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하는 최영준. 무릇 복고를 통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마치 그날의 청중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공연장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 변사의 말처럼 말이죠”라며 <검사와 여선생> 대사 한 자락을 길게 뽑는다.

“억울하게 남편을 죽인 살인자로 몰렸으니….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더냐!”

글 이종철 사진 남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