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줏빛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며 떠났다. 그 뒤를 따르려는 듯이 봉숭아 씨앗은 제 몸 단단히 여물어갔다. 멀리 튀어 예쁘게 피어나려고 껍질을 팽팽히 당긴 씨앗은 드디어 꽃잎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자리 잡았다.

“엄마는 왜 해가 바뀌어도 몇 년 동안 나이가 변하지 않아요?”

큰딸이 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서울의 여의도 증권가에서 직장에 다니다 지리산으로 내려간 나는 도시물을 벗기기 위해, 덜 배운 척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읍내 사람들과 섞이기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부터 동창이거나 선후배, 아니면 남편끼리 죽마고우로 몇 대를 이어 내려오는 지역사회의 유대는 끈끈이주걱의 진액처럼 질겼다. 이방인으로 외롭게 시들고 마르는 날들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유치원 소풍을 갔다. 자기들은 모두 서른세 살이고 딸딸이 엄마라며 서울에서 이사 온 나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굳게 닫힌 성문을 열기 위해 나도 서른세 살이며 딸딸이 엄마라고 엉겁결에 둘러댔다. 그 날부터 나는 두 살을 더 먹은 낯선 내가 되었다. 들통날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기회만 되면 내 나이를 알려주었고 남편에게도 일러두었다.

그렇게 십 년을 살고 도시로 이사 나온 뒤, 내가 묶어놓은 족쇄가 풀어지는 것 같아 홀가분했다. 내 나이를 찾은 기쁨도 잠시, 문제는 아이들에게 수시로 입력해놓은 나이였다. 잊어버리기를 바랐지만 해가 바뀌면 아이들은 컴퓨터 날짜 바뀌듯이 자동 업데이트 해 나갔다. 이제 머리가 커버린 딸이 왜 몇 년 동안 나이가 같은지 따지고 들었다. 남편은 “네 엄마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나보다”라며 웃었다. 댓가는 혹독했다. 내 나이를 찾기 위해 이 년 동안 나이를 먹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서른세 살 친구들 집단에 섞인 나는 그들의 끈끈한 진액과 섞이기 위해서 나를 낭창낭창 녹여가며 끼어들었다. 그들 집에 초대받으면 나도 그들을 초대했고 함께 지리산도 올랐다. 일부러 하지 않아도 실수가 잦은 나는 그들의 눈에 말랑한 상대로 보였고 실수를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애들 학교 체육대회에 달리기 선수로 나서서 이를 앙 다물고 얼굴은 온통 찌푸리고, 가슴팍은 내밀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1등으로 달려서 눈도장을 찍거나, 철퍼덕 엎어져서 몸 개그를 몇 번 보여주고 나니, 읍내 사람들은 나를 같은 부류의 인간으로 끼워주었다. 그들의 다른 지인들과도 만나면 또 영역을 넓혀나가는 방법으로 10년이 흐르니 강산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 틈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토박이보다 더 토박이스럽다고 했다.

섞이지 못했다면 더운 날 공기는 불같고 추운 날 공기는 차가운 칼 같았을 것이며, 국립공원 제1호의 위용을 자랑하는 지리산과 국보급 문화재로 가득한 천년고찰 화엄사는 나를 가로막는 한갓 거대한 장애물이었을 것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었다. 사이좋게 지내지만 나를 잃지 않고 섞였다. 생물학자들은 끼리끼리 집단은 전염병이나 다른 재해로 멸종의 위기가 크다고 한다. 한 발 짝이라도 더 멀리 흩어져서 다른 종과 섞여야 본질을 잃지 않고 생명력이 질겨지니 다양한 방법으로 섞이고 있었다. 봉숭아 씨앗이 멀리 터지려고 껍질을 팽팽히 당기는 행동처럼 나도 그들과 섞여서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몸부림이었다.

섬진강 고운 모래사장에 바라보이는 원두막에 돗자리를 펼쳤다. 강가 바위틈이나 돌멩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슬기를 쓱 긁어서 물에 끓이고 라면 사리를 넣으면, 익기도 전에 아이들은 달라붙어 침을 삼켰다. 다슬기의 초록색 국물을 마시고나면 아이들은 동화 속 착한 주인공처럼 서로의 얼굴에 묻은 모래나 국물자국을 닦아주곤 했다. 더운 배를 식히고 싶어 초록강물에 풍덩 빠지면서 ‘다슬기 낳으러 가요’하면 모두 까르르 웃어댔다. 별로 웃기지 않은 일에도 그곳에서는 포복절도하는 일이 흔했다. 자기들이 낳은 다슬기라며 한 주먹씩 다슬기를 긁어 왔다. 딸아이는 밤이 어두워지면 원두막에 누워 ‘구름이불 덮고 별 전등 켜고 잠이 든다’며 멋진 멘트를 날려주어 나까지 동화나라로 데려갔다.

가을에 화엄사 주변 아름드리 고목에서 떨어진 단풍잎이 수북이 쌓인 원두막에 몸을 누우면, 바닥도 단풍이고 하늘도 단풍이지만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낙엽이 사람을 덮어 모든 것이 단풍이 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이불이라며 형형색색 고운 단풍을 긁어모아 아이들을 두껍게 덮어주었다. 말로 하는 가르침은 필요 없었다. 자연이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가슴을 키워서 자연을 담아냈다. 자연이 만든 가슴은 타인과 잘 섞였다. 사방이 터진 원두막에서 삶의 기름진 터전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과 섞이면서 나는 물론이고 아이들도 그들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고 그 땅에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여름의 지리산 계곡에서 딸들은 친구들과 놀다가 설핏한 하늘 저편으로 사그라지는 노을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고, 바위틈에서의 숨바꼭질도 지리산 품 안이었다. 낯설었던 지리산도 놀라운 사계절의 변화로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깨알만 하던 여린 새싹이 밑에서부터 서서히 부풀어서 지리산을 가득 채워 나가 꼭대기에 이를 즈음이면 계곡물이 콸콸 쏟아졌다. 지리산 꼭대기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여 서서히 들판까지 내려와 가을을 쏟아 놓으면 사람들은 축제를 열었다. 봉숭아 꽃잎 으깨어 손톱에 물들이듯이 우리는 지리산의 사람과 자연에 서서히 몸과 마음을 채색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좋은 추억이 무엇인지 더듬어 보라고 하면 서슴지 않고 지리산에서 살았던 일이라며 마음은 벌써 그곳으로 가고 있다.

글 박경옥(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