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여중 시절, 추사 김정희를 처음 알았다. 나도 추사처럼 글씨를 잘 쓰고 싶은 마음에 그때부터 글씨 쓰기에 공을 들였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내 자존심을 세워준 것은 반듯한 글씨체라고 자랑삼아 말하고 싶다.

싱그러움이 살아 숨 쉬는 6월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아홉 해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제주도의 남서부의 대정현(大靜縣)을 찾아가 봤다. 추사 선생이 음력 9월 2일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고 한양을 떠나 온갖 고생 끝에 제주에 도착한 날이 9월 27일이었다. 마침 제주에 큰바람이 불어 적거지가 있는 대정현에는 며칠 뒤에야 도착했다고 한다. 유배 살이 첫발부터가 참으로 고통스럽게 시작된 듯하다.

2010년 건립된 ‘추사관’은 추사 선생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추사 선생의 작품인 『세한도』 그림을 형상화한 추사관은 그리 크지 않은 단아한 규모다. 추사관은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추사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힘든 세월 속에서도 자기만의 학문 세계를 쌓은 추사 선생의 높은 이상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온다. 추사관 바로 뒤편으로 유배생활 당시의 모습이 복원되어 있는데 제주 전통 생활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민가라고 한다. 원래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집주인 강도순 증손의 고증으로 복원됐다. 애달픈 심정으로 적거지에 들어가 보니, 행랑채쯤 되어 보이는 방 안에서 추사 선생이 적거지를 찾아온 초의 선사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고, 용기 내어 마당에 넙죽 엎드려 절하고 싶었는데 쑥스러워 무릎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가 살짝 추사 선생의 옷자락을 만져 봤다. 내가 마흔 해 동안 짝사랑했던 사람을 만났는데 어찌 눈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으랴.

한양에서는 이른바 로열패밀리로 살았는데, 유배지에서 주는 밥이라고는 조 투성이와 입에 맞지 않는 반찬이니 목구멍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한양에서 가지고 온 반찬마저 떨어지자 추사 선생은 반찬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자주 보낸다. 이름도 모를 벌레는 왜 그리도 많은지, 입에 맞지 않는 반찬을 억지로 먹으니 설사병이 끊이지 않는 나날이었다. 바람은 왜 그리도 거세게 부는지,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면 마치 바람이 살에 닿은 듯이 추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 제주도 날씨였다. 55세라는 나이에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에서 절망을 이겨낸다는 건 참으로 힘들었을 테다.

그러나 손에 든 붓은 추사 선생을 살게 한 생명줄이었다. 사계절을 지나고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추사 선생에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처를 옮기면서 탱자나무 가시를 걷어내자 추사 선생 눈에 다가온 것은 제주의 자연이었다. 담장 밑에 핀 수선화며 거무칙칙한 돌담이며 낯을 베듯이 차가운 칼바람마저도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향교에 나가 학동을 가르치는 일이 쏠쏠하게 재미있고, 적거지 바로 앞에 있는 단산 바굼지 오름에 올라가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성난 파도도 그리 무섭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추사 선생의 글씨체가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전에 썼던 글씨체하고는 아주 다른 추사체가 그렇게 태어나게 됐다. 사람들은 추사체야말로 추사 학문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가만히 추사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제주의 풍경이 글씨와 겹쳐진다. 제주를 닮은 글씨체라고 말한다면 다소 무리일까

글씨를 쓴다는 건 사람의 마음을 필기구와 종이에 표현하는 것이다. 추사 선생 덕분에 그 일이 오랫동안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었으니 이다음 또 찾아갈 기회가 생기면 큰절 한 자리 꼭 올리고 싶다.

글·사진 구본석(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