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68년 전인 1446년 태어났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있다가 6년 전인 2008년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이내 어딘지도 모를 곳에 격리됐습니다. 이렇게 격리된 지도 6년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온전하게 빨리 세상에 나오기만을 기다린다는데 아직 기약이 없는 듯합니다. 나는 언제쯤 다시 빛을 볼 수 있을까요.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6년이 지나도록 '베일'에 싸여 있다.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사본(왼쪽 사진)과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상주본(오른쪽). 문화재청 제공

훈민정음 해례본은 조선 세종 28년(1446년)에 발간된 한글 해설서로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의미·사용법 등을 담고 있다. 상주에서 발견된 해례본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은 판본으로, 상주에서 발견돼 '상주본'으로 불린다.

상주본은 존재가 알려진 지 얼마 안돼 소유권과 절도 소송으로 인한 지루한 법정공방에 휘말리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상주본을 처음 세상에 알린 뒤 이어진 민·형사소송으로 옥살이를 했던 소장자가 자신만 아는 장소에 두고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상주본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이 소장자에게 대법원이 지난 5월 무죄판결을 내리자 주변에서는 상주본이 곧 공개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전 항소심 재판과정에서 이 소장자가 상주본을 국가에 위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어 대법원 확정판결로 명예를 회복한 만큼 자신이 한 말을 이행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다. (완전한 명예 회복과 소유권 문제 해결 등)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상주본이 언제 다시 빛을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고,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500여년 만에 모습 드러냈다 사라져

2008년 7월 문화재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집에서 고서적 한 권이 나왔는데 국보 문화재로 지정받고 싶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경북 상주에 사는 골동품 수집상 배익기씨(51)가 올린 글이었다. 배씨는 "집을 수리하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말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이 감정한 결과 1940년 안동에서 발견돼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은 판본으로 판명됐다. 전체 33장의 목판본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간 하나뿐이라는 것이 정설이어서 문화재계는 깜짝 놀랐다.

서문 네 장과 뒷부분 한 장이 없지만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간송본'보다 종이 상태가 좋고 임진왜란 이전 소장자의 음운학적인 주석도 붙어 있어 가격을 산정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가치가 있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평가됐다.

하지만 상주본의 존재가 알려진 지 얼마 안돼 지역 골동품상 조모씨(2012년 12월 사망)가 자신의 가게에서 도난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조씨는 배씨가 자신의 가게에서 고서적 두 상자를 30만원에 사가면서 나무궤짝 위에 있던 해례본을 몰래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조씨가 배씨를 절도 혐의로 고소했으나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이후 민사소송이 이어지면서 대법원은 2011년 6월 조씨가 배씨를 상대로 낸 물품인도 청구소송에서 조씨를 소유주로 인정했다. '배씨가 훔친 것이니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배씨는 반환을 거부한 채 해례본을 어디에 뒀는지 입을 다물었다. 배씨는 2011년 9월 구속됐으며 1심 판결에서 절도 혐의가 인정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2012년 9월 풀려났다.

재판하는 동안 문화재청과 검찰·법원이 배씨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강제 회수에 나섰지만 상주본은 찾지 못했다. 민사소송에서 이긴 조씨는 배씨가 은닉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주본을 2012년 5월 국가에 기증하겠다며 문화재청에 기증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배씨도 항소심 재판과정에서 상주본을 국가에 위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여지껏 공개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절도혐의' 무죄 확정됐지만 공개는 미뤄

대법원이 지난 5월29일 배씨의 절도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하자 문화재 관련 기관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상주본을 곧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배씨가 명예를 회복한 만큼 이전 재판과정에서 공언했던 대로 상주본을 공개하고 국가에 위탁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그는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난 뒤 "문화재청과 검찰이 상주본 확보에만 혈안이 돼 엉뚱한 (절도) 사건을 만들어 나를 애먹이고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다"며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공개하고 국가 위탁도 고려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배씨는 지난달 29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공개할 단계가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소송과정에서 위증을 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들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며 "문화재청이나 사법기관에서 일련의 소송과정과 배후에 대한 진상을 밝혀야 완전한 명예 회복이 된다"고 말했다. 또 "소유권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덧붙였다. 현재 상주본의 소유권은 사실상 문화재청에 있다. 배씨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이긴 조씨가 실물이 없는 상태지만 문화재청에 기증서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배씨는 그동안 재판에 관계했던 증인들을 위증과 무고로 고소하고 민사소송 재심 청구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유권도 돌려받고 싶어한다. 그는 "이런 산들을 다 넘으면 그때 가서 상주본을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위탁과 관련해서는 "자연스러운 상황이 되면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을 할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속이 탄' 문화재청은 배씨에게 빨리 민사소송 재심 청구를 하라고 권하고 있다. 현 소유주가 사실상 소유권을 다투던 상대에게 빨리 소유권을 찾아가라고 채근하는 격이다. 상주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개인이 보관할 경우 시일이 지날수록 훼손 우려가 더 커지는 만큼 배씨가 주장하는 '공개할 수 있는 상황'을 빨리 조성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해례본은 한번 멸실되면 다시 재생산할 수 없는 민족적 자산으로 누가 가지고 있든 잘 보존해 국민 모두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상주본이 조속히 안전하게 관리·보전될 수 있도록 배씨를 지속적으로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상주본의 운명은 아직도 안갯속에 가려져 있다.

지난달 29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의 한 농가. '정신 사나운 곳'이란 동네 사람들 말이 이해가 갔다. 텃밭까지 포함해 990㎡쯤 되는 쓰러질 듯 낡은 집 안의 마루와 방, 처마 밑, 마당 곳곳에 고가구와 병풍 등 골동품과 석등·도자기, 고서적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장하고 있는 배익기씨가 지난 6월29일 경북 상주 낙동면 집에서 고서적들을 꺼내 살펴보고 있다.

주민들 말대로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이 집은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씨(51)의 집이다. 그는 노모(83)와 둘이 살고 있었다. 고구마·고추 등 밭농사를 조금 지으며 트럭을 몰고 인근 지역을 다니면서 골동품과 민속품 등을 수집해 경매를 하며 지낸다고 했다. 집 앞에는 세종대왕상이 있었다. 자신의 집에 '잘 어울릴 것 같아' 지난해 구미의 한 폐교에서 '모셔왔다'고 했다.

배씨는 기자에게 그간의 고초를 하소연했다. "문화재청과 검찰이 상주본을 빼앗으려고 사건을 만들어 나를 고생시키고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놨다. 처음엔 절도범으로 만들더니 이젠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항소심)재판 과정에서 하도 묻길래 잘 보존해야 하니까 위탁과 (국가)기증을 검토하겠다는 원론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한 것"이라며 "무죄가 확정되면 곧 공개할 것이라 해놓고 약속을 안 지킨다는 식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배씨는 어릴 때부터 고전에 관심이 많았다. 지역의 대학을 다니다 그만둔 뒤 한문학과 고전을 탐독하다 2000년쯤부터 취미 삼아 고서적 등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는 그동안의 독서로 쌓은 지식을 동원해 본격적으로 고서적과 골동품 수집에 뛰어들었다.

그는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거나 수집한 고서적 수천권을 2008년 4월 집수리를 앞두고 정리하기 위해 분류하다가 '예사롭지 않다 싶은' 고서를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문의한 결과 훈민정음 해례본임을 확인했다. 배씨는 "집안 곳곳에 쌓인 수천권의 고서적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어서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것인지, 취미와 생업으로 수집했던 것인지는 사실 분간이 안 간다"고 말했다.

배씨는 상주본을 어디다 보관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당시 당국이 문화재 지정 절차를 알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조씨가 등장했고, 절도범으로 몰렸다"며 "워낙 큰 물건이라 공개 후 뺏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들어 나만 아는 곳에 보관해뒀다"고 밝혔다.

그는 "물건이 뜨면(공개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며 문화재청에 대한 적의와 피해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문화재청이 조씨와 위증자들을 내세워 절도사건을 조작했습니다. 현재 소유권을 문화재청이 갖고 있으니 문화재청으로서는 상주본이 확인되고, 저만 없어지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문화재청이 지금까지 제게 해온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는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소유권 문제가 해결돼 자연스러운 상황이 되면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타당한 결정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씨는 "그런 상황이 되면 공개는 하겠지만 (국가)기증 여부는 미리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상주본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분산 보관돼 있을 거라는 추정이 나오고 일각에서는 훼손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내 입장에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며 함구했다.

그는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내가 별스러운 것은 사실"이라며 "평소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헷갈려 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잘 안 한다"고 말했다.

배씨의 절도사건 조작 주장에 대해 문화재청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문화재청 한 관계자는 "배씨가 엄청난 문화재를 갖고 있어 불안감이 큰 데다 각종 소송에 휘말려 고초를 겪으면서 피해의식이 커져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배씨가 심리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상주본 소유권을 빨리 찾고 (위증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한도 빨리 풀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라며 "상주본을 조속히 공개해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상주 | 글·사진 최슬기 기자 skchoi@kyunghyang.com >

출처: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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