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말 남도의 꽃 잔치에 초대받아 다녀왔다. 전남 5매(梅) 중 한 그루라는 장성 백양사 고불매를 감상하고, 매화 향기를 품은 채 방장산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살포시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의 환영을 받으며 담양 지실마을 매화, 가사문학관,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을 둘러보고 삼지내 마을을 찾았다.

삼지내 마을은 느리지만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동아시아 최초의 슬로우시티이다. 마을에 들어서자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전통 한옥과 돌담길(등록문화재 제265호)이 눈에 들어온다. 돌담 너머에서 매화·동백·산수유·목련 등 봄꽃이 고개를 내밀고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돌담에는 아직 잎이 달리지 않은 담쟁이 넝쿨이 이리저리 엉켜져 춤추고 있다.

골목에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 사신지 오래되었느냐고 여쭈었다. 오래되었다고 하신다. 마을 동쪽 청보리밭 건너 맞은편에 보름달처럼 솟아 있는 산의 형국이 예사롭지 않아 이름을 물으니 산 이름은 월봉산(月峰山)이고, 151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단다.

여느 마을과 달리 내(川)가 마을을 흐르고 있다. 도란도란 흐르는 냇물이 음악처럼 들려온다. 이내 마음이 평온해진다. 마을에는 ‘고재선 가옥’(전라남도민속문화재 제5호)을 비롯하여 몇 채의 전통 가옥이 있다.

문이 열려 있는 ‘고정주 고택’에 들어섰다. 솟을 대문이 오래되어 기왓장이 떨어질 것 같다. 대문에는 큼직한 종이에 ‘머리 주의’라고 씌여 있다. 주인 없는 고가 마당에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방문객을 다소곳이 맞아 준다.

돌담길은 돌과 흙을 섞어 만든 토석담으로 길이가 3.6㎞에 달한다. 아래쪽은 돌의 크기가 크고 위쪽은 아래쪽에 쌓은 돌보다 작다. 무게중심을 잡아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골목 양 옆으로 ‘S’자 형태로 돌담이 감싸고 있다. 성처럼 높지 않은 돌담은 고즈넉한 자태로 나그네 마음도 넉넉하게 받아준다. 적정한 경계를 두되 이웃과의 소통을 배려한 것이리라. 아낙네들은 돌담 너머로 정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어느 집 제삿날이면 마을 젊은이들은 모여 제사가 있는 집에 바구니를 던졌을 것이고, 그 집 주인은 마을 젊은이들이 충분히 나눠 먹을 수 있도록 바구니에 제사음식을 담아 돌담 옆에 내 놓았을 것이다. 그러면 마을 젊은이들은 사랑방에 나와 그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고적한 농촌의 밤을 지새우기도 했을 것이다.

내 유년의 고향집은 돌담이 아닌 흙담이었다. 우리 집 제삿날이면 마을 젊은이들이 바구니를 담장너머 마당으로 던져 놓았다. 어머니는 제사를 마치고 바구니 안에 음식을 가득 담아 담장 아래 내놓았다.

돌담은 제주도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있다. 선조들은 주위에 있는 돌로 담을 쌓았다. 자연을 생활의 일부로 삼은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초여름에 산들바람을 느끼며 삼지내 마을 돌담길을 벗 삼아 다시 걸어보고 싶다.

글·사진 최순자(경기도 파주시 동패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