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인간』이라는 책을 쓴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놀이의 첫 번째 요소로 ‘아곤(Agon)’을 들었다. 아곤은 시합과 경기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이 아곤에는 시합에서 이기려는 경쟁적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로제 카이와는 아곤에서 테니스·축구·권투·펜싱 등 수많은 스포츠 경기가 태어났다고 보았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스포츠에서 놀이적 요소와 경쟁적 요소를 분리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놀이와 경쟁이 견고히 결합된 경계선 상에서 무수한 스포츠가 꽃을 피웠다.

고분 벽화로 본 고구려 스포츠

대표적인 놀이학자인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는 『호모 루덴스』에서 “싸움은 놀이의 가장 집중적이며 정력적인 형식이다. 동시에 가장 생생하고 원색적인 놀이 형식이다”라고 말했다. 싸움과 놀이의 상관적 의미가 잘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스포츠 풍속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의 각저총(角抵塚)에는 고구려 역사(力士)들이 씨름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영남지방에서는 서로 버티고 힘을 견주는 것을 ‘씨룬다’라고 한다. 이 ‘씨룬다’에서 씨름이 생겨났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씨름은 두 명의 씨름꾼이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기이다. 샅바나 띠, 허리춤을 잡고 용을 쓰다가 상대방을 땅바닥에 먼저 넘어뜨리는 사람이 승리하는 스포츠이다.

각저총 벽화의 가운데에는 힘깨나 쓰는 역사(力士)들이 허리를 잡고 서로 버티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지팡이를 잡은 한 노인이 서 있다. 서로 어깨를 마주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허리를 단단히 잡은 모습에서 팽팽한 긴장감까지 감돈다. 그런데 한 씨름꾼의 코가 크고 눈이 큰 생김새로 보아 서역의 인물로 추정된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같은 민족뿐만 아니라 외국인들과도 씨름을 겨뤘던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고대 사회에서 씨름은 싸우고 힘을 겨루는 격투기의 일종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다른 국가와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으며 짐승을 사냥하는 일도 잦았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힘과 무예’였다. 힘을 단련하고 조절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싸움의 기술이 바로 격투기였다.

다른 고분벽화인 안악 3호분과 무용총(舞踊塚)에는 두 사내가 수박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씨름과 수박은 고대로부터 계승되는 겨루기 스포츠의 양대 산맥이었다. 이 벽화에서는 역사들이 한손을 올린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힘을 사용하는 씨름에 비해 수박은 타격 위주이다. 씨름과 수박은 레슬링과 권투로 상호 비교할 만하다. 넘어뜨리고 쓰러뜨리는 ‘힘의 씨름’과 잡고 때리고 찌르는 ‘타격의 수박’은 상호 보완의 스포츠였다. 고구려 무사들은 씨름·수박 등을 통해서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누르고, 때리는 격투기 기술을 터득했을 것이다.

무예에서 유희로, 고려의 마상 격구

고구려인들의 전투 무예가 점차 유희성이 짙어진 경기로 변한 것이 마상 격구이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격구는 주변 나라로 퍼져나가 고구려에도 유입됐다.

마상 격구는 달리는 말 위에서 장시(杖匙)로 공을 쳐서 구문(毬門)으로 들여보내는 경기다. 마상 무예에서 발전한 격구는 먼저 말과 사람이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 기마 민족이 마상 격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달리는 말 위에서 장대를 가지고 공을 몰아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기마술로는 경기조차 할 수 없다. 말을 탄 상태에서 몸을 재빨리 움직이고, 균형 감각을 발휘하는 기마민족은 마상 격구를 점차 놀이로 발전시켰다. 『해동역사』에서는 발해 사신 왕문구(王文矩)가 일본을 방문해 연회 자리에서 격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경기를 보고 깜짝 놀란 일왕은 발해인의 격구 솜씨를 찬양하는 ‘이른 봄에 타구를 보고’라는 시까지 지었다. 고구려 문화를 수용한 발해 사람들은 외교의 장에서 유희로 격구를 보여줄 만큼 발전시킨 것이다.

하지만 마상 격구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격구가 국기로 크게 번성했던 고려시대의 왕들은 뛰어난 격구 선수들을 총애했다. 격구를 잘하는 인물은 벼슬까지 얻는 시대였다.

‘격구왕’이라 부를만한 의종(毅宗)은 대궐에서 국사를 보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격구장으로 달려갔다. 무신정권 시기 최충헌 일행을 따라 격구를 관람한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고려의 격구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당대의 격구는 편싸움 성향이 강한 놀이였다. 격구선수들이 좌우로 선 다음에 공이 던져지면 양쪽에서 일제히 말을 타고 공으로 달려든다. 다음에 공을 몰고 가서 상대편의 골문에 공을 쳐 넣는 것이다. 공을 칠 때는 아무렇게 치는 것이 아니라 양식화된 기본 동작을 따라야 했다. 고려시대에 번성했던 격구는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시대에 들어서 약화됐다.

마을 대항의 혼전(混戰): 조선의 편싸움 놀이

조선시대 우리나라 곳곳에는 고을과 마을이 자리를 잡았다. 이에 줄다리기·석전(石戰 : 돌싸움)·횃불싸움·놋다리밟기 등 마을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공동체 간 대항 놀이도 발전했다. 이런 편싸움은 정월 대보름과 같이 특정한 날에 맞춰 하는 세시풍속이었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단결을 필요로 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화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줄다리기는 같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대동 놀이이자, 다른 마을 간 시합의 성격을 지닌 경쟁적 편싸움이었다. 줄다리기는 지역에 따라 줄당기기(줄땡기기)·줄싸움·줄싸움놀이라고 부르는데, 두 편으로 나누어 줄을 당기면서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줄다리기는 크게 외줄당기기와 쌍줄당기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줄당기기는 전라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영산줄다리기·의령큰줄댕기기·기지시줄다리기·삼척기줄다리기 등 비교적 큰 행사로 진행되는 게 쌍줄당기기이다. 이 쌍줄당기기는 예로부터 군현(郡縣)의 통치자가 있던 큰 고을에서 행해졌다. 쌍줄당기기는 암줄과 숫줄이 달리하며, 동쪽과 서쪽, 위와 아래 등 마을 사람끼리 편을 나눈다. 줄다리기는 편싸움의 결과로 풍흉을 예견하기도 했다. 암줄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숫줄이 이기면 흉년이 들거나, 승리한 마을에 풍년이 들고 패배한 마을에 흉년이 든다는 믿음이 있었다.

마을간 대항에서 기를 쓰며 이기고자 한 것도 줄다리기의 결과가 점복행사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석전(石戰)에서도 통한다. 돌싸움의 승부에 따라 마을의 풍흉이 달라지기 때문에 점차 격렬해진다. 한해의 운수를 거는 석전에서는 신체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승패에 몰입하게 된다. 돌에 맞아 피가 터지고 두개골이 깨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가운데 마을 사람들은 집단적 흥분상태에 빠진다. 길흉을 건 거친 싸움을 통해서 마을 구성원의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결국 거대한 대동의 구현에 한걸음 다가서는 것이다.

글 류승훈(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