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경 감독(노컷뉴스 이명진 기자)다큐멘터리 '신도안'(2008)을 비롯해 형인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업한 '파란만장'(2010), '청출어람'(2012) 등이 우리의 밑바닥 정서에 흐르는 풍속, 무속 등을 흥미롭게 다뤘다는 점을 그 증거로 들 수 있겠다.
6일 개봉하는 신작 '만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박 감독은 이 영화에서 큰무당 김금화(82)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굿이 지닌 사회·문화적 가치와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톺아보는 작업을 벌인다.
만신 개봉을 앞두고 최근 서울 사당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 스스로도 "전통을 재발견하고 현대 문화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많다"고 했다.
"사실 삼십대 후반까지도 전통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겼죠. 나이 오십이 돼서야 전통을 공부하는 학생이 된 셈인데 그동안의 무지에 대한 반성이 생기더군요. 전통에 익숙한 사람은 그 세계에 머물러 살 텐데, 제 경우는 계승보다는 재발견·재구성에 대한 의지가 큰 편이죠."
박 감독은 지금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돕는다는 데 전통의 가치를 두고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나 억압해 왔는지에 대한 반추다.
"우리는 전통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는 단계까지 갔었죠. 이제는 조금 나아졌다고 보지만, 여전히 서구 개인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전통이 설자리는 좁은 게 사실이니까요."
- 어릴 적 무속이나 굿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어릴 적에는 전혀 몰랐다. 접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대학 때 점집에 가본 적은 있다. 당시 재미삼아 본 것이어서 믿지는 않았는데, 누구나 그렇듯 신경은 쓰이더라. (웃음) 이번 작품을 하면서 자료와 현장을 조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접하게 됐다."
- 종교는 있는지.
"가톨릭 집안이어서 영세는 받았는데, 기도도 안하고 성당에도 안 나간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냉담자인 셈이다. 20, 30대 청년 시절에는 종교보다는 과학적 지식에 경도돼 있었다."
- 무속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처음에는 민간 신앙에 관심이 많았다. 계룡산 부근 민속 신앙의 흔적을 따라다닌 신도안을 찍으면서 흔히들 생각하는 점이나 보는 게 무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민속학자들의 책을 접하면서 전통 무속 문화는 예술적·종교적 깊이가 있는, 종합예술이자 종교·사회적으로 오랜 동안 발달한 문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 무당 김금화라는 개인의 삶에서 역사를 끄집어내려는 시도가 흥미롭더라.
"이 영화가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에서 출발했으니 당연한 귀결점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기 온갖 억압을 당하면서 깨알 같이 쓴 노트만 수십 권이었다. 1980년대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뒤부터는 방송에도 나오고 하면서 선생의 존재를 많이들 알게 됐다. 그만큼 억울하게 지냈기에 무속의 가치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더라. 그래서인지 영화 출연 제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셨다. 파란만장이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한 즈음이어서 저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듯하다."
- 영화 자체가 시작이 끝이 되고, 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굿의 순환 형식을 따르는 듯하다.
"영화를 굿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일관된 의도였다. 굿이 보통 3박4일에 걸쳐서 진행되니 형식을 따라간다면 90분짜리 영화로 다루기는 어렵다. 굿을 보면서 울다 웃고 같이 노는 변화무쌍함, 굿을 체험한 뒤 겪는 감정을 영화를 통해 느끼도록 하는 게 관건이었다."
-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담긴 '쇠걸립(무당이 쓰는 도구를 만들고자 마을을 돌며 쓸모없는 쇠를 모으는 일)' 엔딩 시퀀스가 몹시 인상적이다.
"자서전에는 앞 부분에 있던 내용인데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태어나자마자 딸이라는 이유로 죽을 뻔하고, 열네 살까지 특별한 이름도 없이 넘세(다음에는 아들이 넘본다는 의미)로 불리며 동네 아이들에게 구박당한 그녀다. 오갈데 없는 아이인데 예쁘고 춤도 잘 추니, 서러움이 컸을 것이다. 그런 아이가 신이 내린 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걸립을 한다. 영화에서는 평이하게 그려졌지만, 자서전에는 약간 미쳐서 마을을 돌아다닌다. 큰무당이 되는 것을 공동체에서 공유하는 과정인데, 설움을 참아야 했던 아이가 공동체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스스로 받은 고통의 크기가 엄청나기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 전체를 소녀 넘세에 대한 애정으로 바라봐도 무방할 것이다."
박찬경 감독(노컷뉴스 이명진 기자)"머릿속에 그려 둔 의도라기보다는 2년여 동안 영화를 만들 당시 현실적인 조건이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이다. 제작비가 없어 부분적으로 만들면서 펀딩을 해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극적인 구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챕터별로 구분하는 방식을 택했다."
- 시공을 초월해 실제 김금화와 극중 김금화(문소리 류현경 김새론)가 만나는 신들이 강렬했다.
"김금화가 자신을, 김금화가 배우를, 배우가 배우를 만나는 것이다. 김금화 선생의 삶을 각색해서 드라마로 만들었다는 점을 노출하기 위한 장치였다. 굿판에 가 보면 이게 굿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한 편의 영화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이 굿과 현실의 관계를 곱씹어 봤으면 했다. 영화를 통해 굿을 보지만, 이 영화가 굿의 확장이다. 이 영화도 걸립을 해서 만들었으니(펀딩으로 제작비를 충당한 것을 이르는 말) 제작 과정 자체를 굿으로 볼 수 있겠다.
- 모든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데, 특히 문소리가 압권이다.
"문소리 씨가 해 주면 고맙겠다는 마음으로,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제의를 했다. 문소리 씨가 김금화 선생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서전을 보내 줬는데 보면서 울었다고 하더라. 대학 다닐 때 판소리도 했고 무속에 대한 편견도 없고 해서 그 연배의 배우치고는 전통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어서 좋았다."
- 무속신들을 나타낸 그림이 애니메이션으로 연결되는 효과도 인상적이더라.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등 서구 판타지 문화에 잠식돼 있는데, 그 문화의 내용을 잘 알면서 받아들이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위험하다. 강제되는 세계는 아이들에게 좋은 문화가 아니라고 본다. 물질문명이 서구화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판타지나 상상의 세계까지 감각적으로 지배당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극중 무속신 애니메이션은 '우리 것도 재미있다'는 선언문인 셈이다. 특정 매체의 순수성을 믿지 않는 입장이어서 극영화에 애니메이션이 필요하다고 봤고, 거부감 없이 넣을 수 있었다."
- 이념 갈등, 분단, 독재 등 한국 현대사에 대한 통찰이 엿보이던데.
"80년대 학번으로서 역사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관심 있게 보는 일은 자연과 같은 것이다. 한국 사회가 풀지 못하는 문제가 많다. 남북관계, 성장 일변도의 경제, 실업률 등이 심각하고 언제 금융위기가 다시 올지 모른다. 이런 것이 어디서 시작됐느냐를 볼 때 역사는 무기가 된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앞으로 작품을 하면서도 계속 가져갈 문제다."
- 영화 속 굿의 과정을 보면서 소통과 치유에 대한 목마름이 읽히더라.
"정신과 의사들은 관찰을 통해 치료하지만, 무당은 공감을 통해 한다. 굿을 매개로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서로에게 쌓였던 앙금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위해 신도 끌어들이고 음식도 끌어들이고 음담패설도 끌어들이고 춤과 노래도 끌어들인다. 가능한 모든 것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굿판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진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평등하다. 공동체에 원기를 주고 유지하도록 하는 행위가 굿인 셈이다.
- 영화를 한 편의 굿으로 본 이번 작품을 통해 감독으로서 새로운 고민이 생겼을 법도 한데.
"다음에 굿을 한다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무당으로 치면 새만신인 셈인데, 김금화 선생이 열일곱 살에 한 일을 나는 쉰이 돼서야 한다. (웃음) 3년째 영화 연출을 하니 스스로도 점점 나아지는 것이 느껴지더라. 처음보다는 뒤로 갈수록 그림이 낫다. 그런 경험이 성장의 과정일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무당을 공경하는 입장이니, 저를 단지 종합예술인으로서의 무당에 비유해 주는 것은 '땡큐'다. (웃음)"
- 앞으로 어떤 작업을 벌일 계획인가.
"9월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데, 광주비엔날레에 견줄 만한 2년마다 열리는 비엔날레여서 잘 마무리하는 게 급선무다. 그것을 마치면 장르 영화를 해보고 싶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는 영화만 하다 보면 재미가 없으니 혼자 하는 미술작품도 만들 계획이다."
- 형인 박찬욱 감독은 조력자인가, 경쟁자인가.
"나는 이제 막 아이스링크에 발을 디딘 사람이니 형을 피해 가야 하지 않을까. (웃음) 형과 경쟁을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영화계의 든든한 선배다."
- 만신을 볼 관객들에게 한 마디.
"넘세라는 아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시기를 바란다. 그 아이가 고통을 어떻게 복으로 갚는지를 말이다. 용서 못할 사람, 용서해서는 안 될 경우도 있지만, 복수는 목적이 될 수 없으니까."
출처:노컷뉴스
기사원문보기:http://www.nocutnews.co.kr/news/1195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