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새해를 알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년 달력을 찍는 인쇄소의 풍경은 새해를 알리는 첫 번째 뉴스였다. 바쁘게 작업하는 인쇄공의 손놀림은 크리스마스트리 보다 더 빨리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렸다. 새 달력은 예나 지금이나 뭔가 특별한 느낌을 준다.

몸져누워 동지를 보내고 나니 一病過冬至

오늘 아침이 소한이네. 今朝是小寒

다시 신년의 책력을 본들 又看新歲曆

소년의 기쁨을 돌이킬 수 있겠는가. 那復少年歡

- 신흠(申欽, 1566~1628),“ 소한 날 병중에 읊어 좌상(座上)께 보여주다.”

동지하면 팥죽을 떠올리지만, 옛 사인(士人)들에게는 책력(冊曆)이 이슈였다. 책력은 일종의 달력이지만, 오늘날의 달력에비해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큰 달과 작은 달, 절기, 일출, 일몰시간 뿐 아니라 그 날에 해서 좋은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나왔다. 동짓날 관상감(觀象監)에서 책력을 진상하면 임금은 책력을 관원과 관아에 하사하였다. 책력을 받은 이들은 집안의 대소사를 확인했고, 어떤 이들은 책력을 요즘의 다이어리처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사소절(士小節)』에서 책력에는 사사로운 기록이 많기 때문에, 타인의 집에 방문해서는 그 집안의 책력을 함부로 뒤져 보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지책력은 단오부채와 더불어 중요한 선물이었다. 지방관을 제수 받은 관인은 부임하기 전 자신의 임명장을 써준 이조(吏曹)의 아전에게 사례를 하는데, 이에 대한 답례로 아전은 동짓날 인출한 책력을 지방관에게 보냈다고 한다. 조선전기 관상감에서는 해마다 4,000부의 책력을 인출했지만, 점차 늘어나 18세기에는 15,000부 이상 제작했다. 그러나 늘 수요는 그 이상이어서, 일부 번외로 제작되는 것도 있었음에도 모두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방의 양반들은 자신이 써야 할 것 뿐 아니라 주변의 제자와 자제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책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충분한 수의 책력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충청도 남포(南浦 : 오늘날 보령 남포면)에 살았던 조병덕(趙秉悳, 1800~1870)도 매년 30~40건이 필요했다. 1860년 10월 28일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책력은 비록 한두 냥으로도 사와야 낭패를 면할 것 같기에 여기 돈을 보낸다”라고 하였다. 그는 매년 이 정도 비용을 지출해 책력을 구입했고, 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책력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빌려 베끼기도 하였다. 이렇게 책력은 경향 각지로 흘러 사람들에게 절후의 지침이 되었다.

백성을 위해 그림으로 시간을 표시하다

광화문 사거리의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비각에서 광화문우체국으로 건너오는 횡단보도 주변을 살펴보면 작은 표석이 하나 있다. 경복궁 동쪽 담을 지나 청계천과 합류하는 중학천(中學川)에 놓였던 다리 혜정교(惠政橋)의 표석이다. 육조(六曹)의 관아와 종로의 시전(市廛)이 만나는 길목이니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것이다. 1434년 세종대왕은 이곳에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설치했다.

앙부일구는 생김새가 솥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 원리는 그림자로 태양의 위치를 가상의 천구(天球)인 솥 안쪽바닥에 표시하는 것이다. 해의 위치에 따라 그림자의 방향과 길이가 변화하면서 이를 통해 시간은 물론 절기도 알려 주었다.

앙부일구를 보면 몇 가지 장치를 볼 수 있다. 솥 한 가운데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비올 때 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뚫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네 귀퉁이의 다리를 연결하는 십자형 받침에는 홈이 있는데, 이것은 물을 넣어 앙부일구가 수평에 맞게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세종이 만든 앙부일구에는 하나 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시간을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시간을 십이지로 표시했다. 한 시진(時辰)은 대략 두 시간 정도였으며, 이를 다시 초(初)와 정(正)으로 나누었다. 요즘도 사용하는 자정(子正)이나 정오(正午)는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앙부일구에는 해가 떠 있는 시간, 즉 묘시(卯時: 대략 오전 5시~오전 7시)부터 유시(酉時 : 대략 오후 5시~오후 7시)까지 표시되어 있다. 세종은 앙부일구에 각 시진에 해당하는 십이지신상을 그려 넣도록 했다. 이는 글자를 모르는 백성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혜정교의 앙부일구에는 백성과 소통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세종대왕의 모습이 담겨 있다.

무엇을 할 때에는 凡所設施

시간보다 중한 것이 없으니 莫大時也

...(중략)

신상을 그려 넣은 것은 圖神身

어리석은 백성 때문이고 爲愚氓也

각과 분이 분명한 것은 刻分昭昭

해가 비쳐 뚜렷해지기 때문이고 透日明也

길가에 설치한 것은 置于路旁

구경꾼이 모여들기 때문이니 觀者聚也

이제 지금부터 自今伊始

백성들은 할 일을 알게 될 것이다. 民知作也

- 김돈(金暾, 1385~1440),“ 앙부일구명(仰釜日晷銘)”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앙부일구는 모두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청동, 돌, 자기 재질의 다양한 앙부일구가 국립고궁박물관을 비롯한 국내·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조선을 대표하는 천문도라면 앙부일구는 조선을 대표하는 시계였다. 앙부일구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제작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소형 앙부일구가 다수 제작되었다.

강윤(姜潤, 1830~1898)과 강건(姜, 1843~1909)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앙부일구 제작자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앙부 일구 바닥에 자신의 이름과 언제 제작했는지를 새겨 넣었다. 앙부일구는 바늘[영침]이 정남쪽을 향해야 정확한 시간을 얻을 수 있는데, 이들이 만든 앙부일구는 어디서나 쉽게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나침반도 갖추었다. 이런 휴대용 앙부일구는 서구식 24 시제(時制)가 도입된 20세기 초까지 제작되었다.

아침을 여는 사람들

밤이 되면 물시계로 시간을 측정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넣고 관을 연결하여 일정시간 아래로 떨어지는 양을 통해 시간을 계산한다. 물시계는 누기(漏器)라고도 불렸으며, 물시계가 설치된 곳을 누각(漏閣)이라 하였다. 그리고 물시계는 보통 궁궐 안에 설치했기 때문에 금루(禁漏) 또는 옥루(玉漏)라 부르기도 하였다.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 등이 물시계에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장치를 추가한 것이 자격루(自擊漏)다. 오늘날 이 자격루는 남아 있지 않지만, 중종(中宗) 때 새로 만든 장치 일부가 덕수궁(德壽宮)에 있다.

밤의 시간은 5경(更)으로 구분했고, 매 경은 다시 5점(點)으로 나눴다. 그리고 경마다 북을, 그리고 점마다 징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궁궐에서는 금루에 배속된 군사가 전각을 돌며 시간이 적힌 시패(時牌)를 꽂고 큰 소리로 시각을 알렸는데, 주로 나이 어린 이들이 담당하였다. 영조(英祖)는 어느날 시간을 외치는 소리가 가곡 같다며 한 사졸에게 큰 상을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졸이 상을 바라고 매우 큰 소리로 시간을 알렸다가 주상의 잠자리를 어지럽힌 죄로 벌을 받기도 하였다.

밤새 물시계를 작동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 물을 채워 넣어줘야 하며, 특히 겨울철에는 몸이 다 젖은 채로 물이 얼지 않도록 물시계를 지켜야 했다. 반면 책임은 막중하여 시간의 측정에 오류가 있거나 시간을 잘못 알렸을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태초의 시절부터 萬古初

밤은 과연 길도다. 夜果長

금루관의 禁漏官

마음 씀은 其用心

전보다 더하여 一培前

기쁘게 새벽을 알려라. 快開東

- 영조(英祖),“ 문의 개방을 알리다” 가운데

밤을 지새고 5경 3점이 되면 금루관은 ‘파루(罷漏)’를 알린다. 파루가 되면 33번 북이 울리며 인경[人定: 밤 10시경] 이후 닫혔던 성문이 열린다. 33번 북을 울리는 이유는 제석천(帝釋天)이 다스리는 하늘의 33천(天)에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하루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의미였다고 전한다. 파루는 통금이 해제되고 사람들의 활동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는 평생 파루 이전에 잠을 깼다고하며, 이조판서를 역임했던 임담(林, 1596~1652)도 여러 관직을 겸임하여 파루 때부터 관아에 나왔다고 한다.

파루는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보다 일찍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조선 전기 승정원(承政院)의 승지는 비서기관이었던 만큼 일찍 출근해야 했다. 따라서 파루에 궁문이 열리면 바로 입궐해야 했기에 4경에 궁궐에 나아가 문 열기를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보신각(普信閣)의 종소리와 함께 2014년 새해가 밝았다. 보신각 제야의 종 역시 33번 타종한다. 한 해의 파루인 셈이다. 성문이 열리고 해뜨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에 서서 어떤 한 해를 맞이할지 기대해 본다.

글 이태희(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