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프랑스 파리에 봉 마르쉐라는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매장 면적 25,000㎡의 규모에 아크등 360개, 백열등 3,000개를 설치하여 휘황찬란한 빛을 밤거리에 뿌렸던 이 건물은 당대 어느 궁궐이나 신전보다도 화려하고 웅장했다. 에밀 졸라(Emile Zola)는 그다운 통찰력으로 이건물의 위상을 정의했다.‘저게 현대의 신전이다’

현대 도시민들에게, 아니 현대인 모두에게, 백화점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장소다. 백화점은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 이른바‘물질만능주의’시대에 물신物神이 거처하는 성소聖所다. 사람들은 수시로 이 성소에 찾아가 어떤 물질이 새로 나왔는지, 어떤물질이 자신에게 더 큰 심리적, 영적靈的만족을 줄 수 있는지 경건하게 살피고, 마음에 드는 물질을 영접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이성소는 십일조나 투명 봉투 같은‘헌금의 규칙’을 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적 위안을 얻기 위해 거액을 헌금하곤 한다. 백화점 상품들이 같은 품질의 시장 물건보다 훨씬 더 비싸더라도 문제 삼지 않는다. 사람들이 백화점을 찾는 이유는, 물질이 아니라 욕망을 소비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에서 백화점을 자처한 최초의 상점은 1908년에 설립된 한양상회였다.‘해외 여러 제조장과 특약을 체결하고 참신 유행의 양호품을 수입하며 우리나라 중앙인 한성 종로에 자리하여 장대한 가옥에 화려한 진열로 우리나라 제일가는 데파트먼트스토아, 즉 최완전한 점포를 이루었나이다’(1910년 1월 1일자 황성신문 광고). 이 짧은 광고 문안은 해외수입 상품, 참신 유행, 나라의 중앙, 장대한 가옥, 화려한 진열 등 현대 백화점이 갖춰야 할 요소들을 망라하고 있다. 한양상회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작은 잡화점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백화점에 대한‘이미지’는 20세기 벽두에 이미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도시 중산층 이상을 주고객으로 삼아 고급 의류와 생활용품들을 파는 현대적 백화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에는 몇 가지 전제가 더 필요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유통 관계가 확장되어야 했고, 도시 중산층이 형성되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사용가치의 잔존 여부보다 유행을 먼저 따지는 소비문화가 만들어져야 했다. 신문과 잡지는 사람들의 잠재된 욕망을 자극하거나, 없던 욕망을 생성시켰다. 인쇄매체들을 통해 전달되는 각종 상품에 대한 시각 정보들은 꼭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보았기 때문에, 그저 사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백화점은 이렇게 형성된 집단적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설이었다.

서울에서는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인 거류지였던 충무로(당시 혼마치) 일대에 있던큰상점들이 먼저 백화점의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미츠코시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히로다 백화점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백화점 쇼윈도우의 휘황찬란한 모습에 매료된 사람들은 다투어 충무로로 발길을 옮겼다. 조선시대 이래 서울의 중심 상가였던 종로에도 그런 백화점이 하나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젊은 실업가 박흥식은, 옛 입전立廛도가 자리에 있던 화신상회를 사들여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증개축한 뒤 백화점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듬해 화신상회 옆에 새로 건립된 동아백화점까지 인수하여 동관과 서관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대형 백화점을 만들었다.

그런데 1935년 1월, 화신백화점 서관에서 불이 나 삽시간에 두 건물 모두를 태웠다. 다음날 화신의 중역회의는 즉각 본래그자리에 초현대적인 백화점을 새로 짓기로 결정했다. 1937년 11월, 지하 1층, 지상 6층, 총 건평 3,011평의 새 백화점 건물이 준공되었다.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이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을 뿐 아니라,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옥상에 전광뉴스판이 걸려 준공되자마자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서울에 다녀간 시골 사람이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이‘화신에 가 보았느냐’가 되는 시대가 열렸다.

대중 매체가 사람들의 잠재된‘소비욕망’을 일깨웠다면, 백화점은 그소비욕망을 남보다 우월한 방식으로 실현하는 경험을 제공했다. 그곳은 또 자본주의적 물질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공개된 박물관이었다. 사람들은 백화점 안에서 상품들을 구경하는 사이에, 당대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무의식중에 깨달을수있었다. 그곳은‘소비하는인간’,‘욕망을해방시킨인간’을만들어내는기계였다.

반세기 넘게 서울의 랜드마크 구실을 해왔던 화신백화점은 1987년에 헐렸다. 지금 그 자리는 현대 한국 재계의 맹주인 삼성이 지은‘종로타워’가 차지했다. 조선시대에는 육의전의 수전首廛이었던 입전立廛이 있던 곳으로, 600여 년 넘게 한국 재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자리다. 지금 종로타워는더이상 백화점이 아니지만, 그 건물은 여전히‘욕망의 바벨탑’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글. 전우용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사진. 김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