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로서의 기록

영화나 TV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는 물론 음악과 미술 등 각종 문화예술분야에서 역사가 주요 소재를 제공하곤 한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있었던 사실이나 기록된 실제라기보다는, 상상과 추론에 기댄 흥미와 감동을 창작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역사적인 기록은 참으로 다양한 이용가치를 갖는 한편, 서로 다르다 못해 상반되거나 충돌되는 해석도 가능하다.수준 높은 기록문화의 결정체로 평가받는 우리의 실록實錄은 기록된 수많은 사실로부터 역사적 의의를 도출해내는 지성知性의 힘에 기반한 것이었다. 기록에 근거하여 역사를 서술, 편찬하는 것으로, 인식과 평가, 해석과 교훈이 핵심을 이루었다. 그 때문에 기록은 역사이고 동시에 정치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士禍였던 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는 기록과 역사를 도구로 삼은 정치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현대 기록관리학에서는 업무활동과 기록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춘다. 기록은 업무활동의 사실과 내용을 입증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 인식된다. 증거로서의 성격이 핵심인 기록은 진본성(authenticity), 신뢰성(reliability), 무결성(integrity), 이용가능성(usability)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기록의 요건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곧 기록관리이다.

체계적인 기록관리는 업무의 효율적이고 책임 있는 수행을 지원하고, 업무활동과 업무담당자들을 각종 의혹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조직은 물론이고 고객이나 이해당사자들의 권리 또한 보호한다.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일체감을 증진시키고 집단적 기억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기록관리의 핵심은 그 자체의 투명성과 신뢰성, 무결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신뢰하기 힘든 국가기록관리

우리나라가 법률 차원에서 현대적인 기록관리제도를 갖춘 것은 불과 10여년밖에 되지 못했다. 대통령기록의 경우 2000년부터 실행된 공공기록관리법의 일부 조항으로 제도화되었다가, 2007년 별도의 대통령기록관리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길지 않은 이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국가기록관리의 문제가 논란을 일으켜왔다.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의 핵심 기록이 무단 폐기되는가 하면, 보호되어야 할 인권과 개인정보가 언론에 오르내리며 논란을 부추기기도 한다.

참여정부의 경우 대통령기록관리법을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하여 820여만 건에 달하는 다량의 기록을 이관하였지만, 퇴임 후 새로운 여당으로부터 ‘최초의 역사 폐기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기록 삭제’의 의심을 받았던 이명박 정부는 정책결정과정을 보여주는 성격의 기록의 수량이 줄고 비밀기록은 한 건도 없어 비판을 야기하였다. 2008년 ‘쌀 직불금’에 대한 회의록 등 참여정부의 대통령지정기록이 국회의 요구와 의결로 보호가 풀렸고, 뒤이어 ‘대통령기록 유출’ 논란이 벌어졌다. 이 논란으로 전직 대통령이 임명한 대통령기록관장이 해임되고 관련자들이 고소되었으나, 마침내 전직 대통령의 서거 후 종결 처리되었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작년 가을부터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공개에 대한 요구가 불거졌고, 지난 여름 마침내 국가정보원이 언론을 통해 전문을 공개하였다.

그동안 이 대화록은 통일 및 안보 등의 측면에서 각별한 보호가 필요한 대통령지정기록으로 지정되어, 대통령기록관에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이 이 대화록의 원본을 비밀기록으로 소장해왔다고 공표하고, 스스로 비밀보호 장치를 해제하고 공개한 것이다. 대통령기록관에 보존되어 있으리라 믿었던 대화록은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고, 급기야 대통령기록의 ‘실종사태’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