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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에서 지난해 7월 발견된 고구려 비석과 관련해, 한국고대사학회는 지난달 30일 서울 외국어대 오바마홀에서 언론설명회를 열고 비석에 대한 1차 검토 회의 결과를 공개했다. 이 학회의 연구이사인 윤용구 박사가 지안 고구려 비석의 기본 얼개에 대해 밝히고 있다. 뉴스1 |
이미 학계는 발빠르게 나서기 시작했다. 고구려발해 학회는 22일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이 비석에 대한 예비적 검토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며, 발견 사실을 국내에 처음 알린 한국고대사학회도 지난달 29일 검토회의에 이어 4월 대규모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국내 학자 누구도 현지 실물도 보지못한 상태에서 사진 한장만을 대상으로 학술대회를 경쟁적으로 열 만큼 관심이 뜨거운 배경은 뭘까. 지난 30일 한국고대사학회가 언론에 공개한 비석 검토결과를 바탕으로 비석에 얽힌 궁금증들을 정리했다.
■ 비석의 정체는? 제2광개토왕비인가 지안 고구려 비석의 성격이 고구려 땅의 일부 백성을 왕릉 묘지기로 징발해 지키고 관리하는 법도를 담은 수묘비라는 데는 학계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예서체로 새긴 명문을 보면, 개국과 왕위 전승을 기술한 머릿 부분 외에는 3분의 2가 수묘와 제사 제도를 정비한 배경, 관리 방식을 다룬 율령(법령) 제정, 비석 건립, 묘지기 신분 등에 대한 서술로 채워져 있다. 부유한 자들이 묘지기 부역자(수묘연호)들을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각 선왕의 묘에 연호의 호장(대표자) 20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워 후세에 보인다는 내용 등이 보인다.
주목되는 건 이 비석의 명문 내용이 광개토왕 비에 언급된 기존 수묘제 기록들보다 훨씬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광개토왕 비를 보면, 고구려에서는 옛부터 선대의 왕릉 옆에 수묘인들의 마을을 만들어 그들에게 왕릉과 부속 시설의 청소, 제사 등의 관리를 대대로 맡겼다. 각 능묘의 수묘인 마을들이 서로 뒤섞여 혼란이 생기자, 광개토왕이 각 수묘인 내력을 적은 비석을 역대 왕릉 옆에 세워 착오를 바로잡았다는 대목도 기록되어 있다.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 등 학회쪽 연구자들은 새 비석 내용이 이런 광개토왕 비의 수묘제 기사보다 더욱 상세한 세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철에 강가 제사를 지냈다거나, 수묘 부역을 맡은 징발 인력(연호)의 구체적인 사람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두(斗)’의 표현 등 광개토왕비에 없는 문구들이 상당수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안 고구려비는 수묘제와 관련된 행정법규 등을 적은 일종의 문서비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한나라 이후 중국의 석비들 가운데서는 행정 규정 등을 그대로 새긴 문서비들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따라서 왕의 정복활동 치적 등을 수묘제 기록과 함께 명기한 광개토왕 비와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광개토왕 비의 수묘제 관련 내용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유일한 실물 자료라는 점도 중요하다.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비석 뒷면에는 징발된 연호들의 출신지와 인명이 표기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중국쪽이 공개한 자료에는 글자가 마멸됐다고 나와있어 앞으로 실물의 마멸된 글자를 어떻게 풀어 읽느냐가 더욱 중요한 관건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 과연 고구려 최고의 비석인가 한국고대사학회는 언론 설명회에서 이 비석이 광개토왕 치세기에 만들어졌으며, 그의 사후 건립된 광개토왕비보다 앞선, 고구려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명문 중에 ‘무□년(戊□年)에 (수묘제에 대한) 율(律:법률)을 제정한 이래 영을 내려 수복하게 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간기인 ‘戊□年’의 해석을 놓고 ‘무자년(戊子年)’ 설과 ‘무오년’(戊午年) 설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간기 앞부분 글자들이 사라진 탓에 누가 이런 업적을 세운 주체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일단, 무자년이면 광개토왕의 선왕인 388년 고국양왕 때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고국양왕이 율을 제정해 수묘제도를 정비한 뒤 광개토왕 때 비석을 세워 기록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광개토왕비보다 비석 연대가 올라가게 된다. 무오년설의 경우 장수왕 때인 418년이 되어 광개토왕비보다 후대가 되지만, 고국원왕 때인 358년으로 60년을 끌어올릴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원왕의 아들이자 고국양왕의 형인 소수림왕 때에 율령을 반포했다고 전하는데, 이 두가지 설에 따르면 고국양왕이나 고국원왕 때도 율령을 정해 수묘제를 정비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크게 두 의견으로 갈라진 간기 연대 논란은 앞으로 더욱 복잡한 역사 추리 양상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고구려사 전공인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지난달 <중국문물보>에 공개된 중국쪽 비석 판독문은 비석에 새겨진 명문 218자 가운데 140자만 읽은 것으로, 문제의 간기 부분은 ‘戊□年’으로만 표기해 판독을 유보했다”며 “중국 현지 학자들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앞으로 실물 글자를 정밀판독해야만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비석 생김새는 왜 다른가 국내 학자들이 당혹해했던 부분이 비석의 모양새다. 지안 고구려비는 납작하고 평평한 앞뒷면에, 윗부분은 뾰족한 삼각형인 이른바 ‘규수형(圭首形) 양식’이다. 사각 기둥 모양의 광개토왕비, 중원 고구려비 등과 모양새가 크게 다르고, 오히려 당대 중국 석비 양식과 비슷하다. 실제로 <신문화망> 등 중국 언론 보도를 보면, 현장에서 비석을 감별한 중국 학자들은 “규형의 비석은 동한 시대 이래 널리 쓰인 형태로 고구려와 중원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반영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호규 교수는 지안 고구려비는 중국의 비석 양식을 수용하는 초창기 단계의 유물이며 이를 바탕으로 후대 광개토왕 비 등의 독창적인 양식이 창출되었을 것이란 추정을 폈다. 그러나 이런 계보를 입증할 만한 중간 단계 양식의 유물이 전무하기 때문에, 이 비석이 양식적으로 왜 차이가 큰 지는 풀어야할 의문으로 남게됐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이 비석에 쓰인 예서체도 광개토왕비의 예서체와는 다소 다른 필체라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하고 있다.
■ 비석 실물을 볼 수 있을까 고구려 비석은 현재 중국 지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박물관쪽은 내부공사를 이유로 문을 닫았고, 외부 출입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박물관은 5월 재개관할 예정이나, 비석이 공개될 지는 미지수다. 윤용구 한국고대사학회 연구이사는 “중국 당국이 비석이 발견된지 5달여만에 신속하게 언론에 사실을 공개했고, 한-중간 민감한 역사적 이슈를 담은 유물도 아니기 때문에 보고서와 실물 공개를 막을 걸림돌은 별로 없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나 현지 조사에 참여한 중국쪽 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핵심 연구자들이라는 점이 최근 국내 언론에 보도됐고, 중국 당국이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쪽 반발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는 점에서 실물 공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비석의 표기 방식또한 고민거리다. 중국쪽이 아직 공식 표기를 확정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한국고대사학회는 지안 고구려비로 잠정 표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 또한 지안에 있으므로, 지안 고구려 수묘비, 지안 마센촌 고구려비 등으로 구분해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겨레신문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