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현재 그리고 미래
동양의 근대화가 서양의 식민지화와 이식된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뤄지다 보니 서양의 것은 선진적인 것,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열등감이 우리 전 사회를 지배해 왔다. 오늘의 변화와 혁신의 흐름에도 이러한 모습이 비슷하게 적용되는 듯 수많은 서양의 경영 이론과 기업 사례들은 올바른 번역조차 되지 않은 채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조상의 얼과 숨결이 깃든 문화유산을 잘 가꾸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을 미션으로 삼고 있는 문화재청은 조선시대 군주와 정치가,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 분들이 당 시대를 살아가면서 일궈 낸 개혁과 변화에 대한 의지를 배우고자 ‘선조에게서 배우는 혁신리더십’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중 4명의 군주(태종, 세종, 영조, 정조)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태종의 정치에 대한 사랑과 헌신
혼란한 조선 건국 초기, 태종은 ‘육조직계제’를 도입하고 사병을 해체하는가 하면, 종친·공신·외척을 제압하는 등 정치권력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제거했는데, 이로 인해 왕 자신은 늘 고립되었고, 그 때문에 심히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 이외의 것은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정치에의 헌신’을 통해 국가를 구원하고 자기 자신까지 구원하려 하였다.
창업기 당시 태종의 최우선 과제 - 정치권력의 안정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국가 구상은 권력을 분할하여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고려 말의 성리학자들이 과거 왕정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질병이 권력의 독점과 전횡에 있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시라면 모를까 창업기 조선의 상황은 그들을 허락할 수 없었다. 태종은 왕권을 중심으로 모든 권력을 통일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던 탓이다.
태종은 먼저, 의정부의 권력을 해체하여 왕권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켰다. 대간의 언론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정도전이 중시했던 재상권을 점점 축소시켜 결국 그를 무력화시켰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조선 정치체제의 구성 원리를 ‘균형’에 둔 재상 중심의 유교 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업기 조선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선 정치적 정통성과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이 요구되었고, 태종은 이를 최우선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치권력 안정화를 위한 또 하나의 긴급한 과제는 군사력의 장악, 즉 사병의 해체였다. 조선 건국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장 사병 세력의 연합에 의해 이루어진 만큼 조선 왕조는 정치적 동의에 의해 유지되는 군벌연합 국가였다. 이성계는 명목상 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벌연합의 대표였다. 그러나 개국공신들은 각기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언제나 반란의 불씨를 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군사권 통제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지만, 사실 ‘제1차 왕자의 난’의 성공은 이방원이 이성계와 정도전의 사병 해체 및 병권 일원화에 반대하는 공신 세력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국 사병 혁파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이방원은 ‘도독내외제군사’가 되어 군사력 전권을 장악하고,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사병 혁파를 성공시킨다. 이처럼 강력한 카리스마와 신중함은 태종이 갖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종친·공신·외척의 권력을 제압하는 것은 정치권력 안정화를 위한 불가결한 마지막 사항이었다. 거친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란 태종은 권력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보위 세력들을 훌륭하게 선용하였지만, 경우에 따라 이들이 가장 날카로운 반역의 칼날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태조 7년 모든 병권을 박탈당하고 생사의 위기에 처해 정변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걸고 도와준 민무구·민무질 형제와 정사공신이자 좌명공신인 이거이, 그리고 병조판서 강상인과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을 제거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안전하고 확고한 왕권을 세종에게 물려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태종의 삶은 붕망(朋亡 : 인정을 끊는 것), 즉 ‘공적인 목적을 위해 사적인 감정을 버린 삶’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형제, 친척, 친구, 측근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까지도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해야 했다. 태종, 그는 어찌 보면 잔인하고 비인륜적이기까지 한 끊임없는 권력 투쟁의 삶을 살아야 했다. 창업자의 덕목인 ‘용기’와 ‘과감함’, 수성자의 덕목인 ‘지혜’와 ‘신중함’을 함께 갖추고 그 역할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태종은 그런 드문 사례에 속했던 것이다.
세종의 세제 개혁 과정에서 나타난 숙의형 국정 운영
태종이 창업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면, 조선 왕조의 수성기를 한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치세의 시대로 개화시킨 것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거의 모든 국정을 의논을 통해 결정하곤 했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재위 중반기에 세제 개혁을 위해서 17년간에 걸쳐 17만여 명의 백성들의 의견을 묻고, 조정 대소 신료들의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었다. ‘손실답험법’에서 ‘공법’으로의 세제 개편 과정에 나타난 그의 회의 방식과 인재 쓰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를 위한 개혁이고 혁신인가’하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
태종대에 실시된 손실답험법은 농민 부담을 공평히 하기 위해 작황을 10등급으로 나누어 흉작의 정도에 따라 전세를 감해 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 자체는 이상적이었으나, 공전의 경우에는 조사관의 농간이나 주구가 심하였고, 사전의 경우에도 토지 주인의 과중한 세율 책정 등의 이유로 공정을 기하기가 어려워 농민들의 어려움은 날로 커져갔다.
1444년 ‘전분6등연분9등법’이라는 세제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을 때까지 1427년부터 진행한 17년간의 긴 토론과 4단계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반대자들까지도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세제 개혁을 추진한 모습은 개혁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통치자의 강한 의지와 신중한 정책 결정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 농민부터 고위 관료까지 아우르는 민주주의의 시초- 공론화 과정 Four Step
4단계의 공론화 과정이란, 첫째 위로는 고위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여 명을 대상으로 공법에 대한 찬반 조사를 실시하는 과정, 둘째, 이같은 관민들의 여론 조사를 놓고 도성 안의 전·현직 관리들에게 찬반 여부와 그 이유를 보고하게 하는 과정, 셋째, 찬반의 의견을 가진 고관들이 어전 회의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며 공법 실시의 후유증을 검토하는 한편 그 보완책을 마련하는 과정, 넷째, 지역별로 부분 시행한 후 왕이 직접 현지를 답사하고, 백성들의 호응을 본 다음 이를 확대 실시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세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세종은 기득권층의 반대와 계속되는 가뭄·홍수와 같은 열악한 자연환경, 예측할 수 없는 개혁에 대한 불안 심리를 극복하고, 충분한 의견 수렴 후 결단력 있고 책임 있는 결정으로 개혁을 완성하였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정치의 중심’을 잡고, 장기적인 비전을 통해 국가적 시책을 사심 없이 추진해 나갈 때, 그 공동체의 발전은 물론 지도자 자신의 영광도 함께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역사는 또렷이 말해 주고 있다.
상생으로 가는 정치를 실현한 영조의 탕평론과 개혁 정치
숙종 시대는 각종 환국으로 인해 상호 보복의 당쟁사로 얼룩진 비극의 시기였다. 숙종의 뒤를 이어 남인과 소론 대신들의 보호를 받은 경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노론 대신들의 힘으로 왕 세자에 책봉되었던 영조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당시, 영조가 ‘당동벌이黨同伐異’와 상호 보복의 당쟁으로 얼룩진 정국을 ‘상생의 정치’로 바꾸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오늘날의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영조가 추진한 탕평책의 특징은 당파 소속 인물들을 안배하는 방식뿐 아니라, 실제 사업을 통해 탕평파를 결집시켜 가는 방식에 있었다. 먼저, 당파를 화합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호대쌍거互對雙擧’를 바탕으로 노론, 소론, 남인 당파 소속 정치인들을 안배하여 기용하였다. 그 다음, 이조전랑 제도와 사관 제도의 개혁을 통해 사림정치(붕당정치)의 꽃이었던 청요직을 없애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후 대동 정책으로 불리는 민생 관련 사업을 통해, 강경 노선에서 온건 노선으로 전향한 인물 등을 포섭하여 새로운 ‘탕평파’를 결집하였다. 당시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군포법의 균역법으로의 개혁, 도성 하천의 정비 사업 등은 이러한 탕평파에 의해 발의되고 추진되었다. 탕평책의 최종 완성은 외척, 노론당을 중심으로 세칭 ‘탕평당’을 통해 정국을 운영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를 가리는 시비론是非論의 파벌 싸움으로 치닫기보다는 ‘누구의 의견이 더 우수한가’하는 우열론優劣論으로 민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면서도 실질적인 사업을 추진하는 생산적 정치의 구현이야말로 영조가 실현하고자 한 탕평책의 요체였다.
오늘날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과 세계로의 문화 개방은 세계적 보편성 코드와 민족적 고유성 코드를 창의적으로 결합시켜 생산적으로 만들어 가는 실질적인 사업을 통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의 통합을 지향하는 상생의 탕평, 전면적이고 제도화된 탕평책을 통한 민주적·민족적 역량의 극대화가 우리 역사 공동체가 가야할 삶의 지향점은 아닐까.
상언과 격쟁을 활용한 정조의 일사천리 민원 해결 비법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 군주인 정조는 재위 기간 24년 동안 총 66회에 걸쳐 경기도 일원에 흩어져 있는 왕릉을 참배하는 능행 길에 올랐다. ‘능행’이란 국왕이 다수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왕릉을 참배하는 행사이므로 행사의 규모가 크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복장이나 의장이 화려하며, 국왕을 가까이에서 대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백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구경거리였다. 정조는 가는 곳마다 행차 구경을 위해 산과 들을 메우고 있는 백성들을 보면서, 이들을 위한 정치를 펼칠 것을 다짐하였고,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해결해 주는 기회로 능행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수령들은 국왕과 백성들의 만남이 곤혹스럽기만 했다. 민원이라는 것이 결국 본인들의 실정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백성들의 민원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방법으로 ‘상언’과 ‘격쟁’을 이용하였다. ‘상언’이란 ‘아랫사람이 국왕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민원인이 정해진 형식의 문서를 작성해 올리는 것을 말하며, ‘격쟁擊錚’이란 민원인이 징·꽹과리·북 등을 쳐서 일행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억울함을 호소하면, 담당 관리가 호소 내용을 받아 적었다가 이를 보고하는 방식이다. 상언은 주로 양반과 중인들이, 격쟁은 평민과 천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영조 대에도 상언과 격쟁이 있었으나, ‘사건사四件事’로 제한되어 있었다. ‘사건사’란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 부자 관계를 밝히는 일, 적처와 첩을 가리는 일, 양인과 천인을 가리는 일’을 말한다. 「정조실록」과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 대에 접수된 상언과 격쟁은 총 4,427건이며, 그 중 상언이 3,092건, 격쟁이 1,335건이다. 일반 백성이나 천민들이 올린 격쟁보다 양반과 중인들이 올린 상언이 2배 이상 많은 편이다. 상언과 격쟁은 국왕의 능행지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그 혜택이 전국에 미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국왕의 능행지 이외의 지역은 암행어사를 활용하여, 자연 재해가 있거나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실상을 살피고 이를 처리하는 방안을 고위 관리들과 토론하여 결정하였다.
또한 정조는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민원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윤음’을 만들어 반포했다. 국왕이 관리나 백성들에게 내리는 훈유訓諭를 담은 글을 윤음綸音이라 하는데, 정조는 한글언해본을 첨부하여 백성들이 국왕의 조치를 빨리 파악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이밖에도 정조는 경제력을 갖춘 백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점차 조직화되던 시대적 추세를 잘 파악하여, 이러한 백성들의 에너지가 국가 체제 내로 흡수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정조가 능행을 통해 백성들을 만나 여론을 수렴하고, 상언과 격쟁을 법제적으로 보장하여 백성들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도록 한 것은 국왕이 여론 수렴의 대상을 일반 백성에까지 확대시켰기 때문이었다.
재위 기간 내, 총 66회에 이르는 능행에서 정조는 상언과 격쟁을 통해 민원을 접수한 것은 물론이고, 조정에 돌아와 그 처리 여부를 확인하는가 하면, 능행길 좌우의 고을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억울한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민원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었고, 위민정치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태종의 정치에 대한 온전한 헌신, 꾸준한 논의와 설득을 통해 개혁을 관철시킨 세종의 의지, 시비론이 아닌 우열론으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개혁을 추진한 영조,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한 정조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지도자들이 놓쳐선 안 될 덕목일 것이다.
글/사진 제공 문화재청 혁신인사기획관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