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글과 그림을 기록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세계적인 발명품인 종이는 3~4세기에 베트남과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전해져, 한지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지의 오랜 숨결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한지는 기록으로서의 종이의 역할뿐만 아니라 의상을 비롯한 생활용품으로, 공예작품으로, 인테리어 요소로 활약하며 세계화를 위해 분주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 한지에는 지금까지 우리 선조들이 쌓아온 고집스런 1600년의 시간이 담겨져 있다. 이제 한지는 현대화, 대중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려는 조화로움이 요구되고 있다.

고구려, 종이를 사용하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종이는 4•5세기경 유물로 추정되는 평양시 청암동토성에서 출토된 마지麻紙와, 대성산성에서 발견된 불경佛經이 적혀진 종이다. 이 종이들은 고르고 치밀하게 엉키어져 있는 삼麻으로 만들어졌다. 고구려가 종이를 생산해낸 것은 372년 태학太學 설치, 불교 공인, 다음해 율령律令 반포로 인해 문서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었다. 제지술製紙術이 전해졌다고 해도 종이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없다면 종이 제작이 활발할 수는 없다. 고구려는 610년 담징 스님이 일본에 제지술을 전할 만큼 종이 생산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나라였다.

목판 인쇄술을 탄생하게 한 종이
하지만 삼국시대에 기록 매체로 가장 널리 쓰인 것은 종이가 아닌 목간木簡이었다. 목간은 나뭇가지를 베어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가격 부담이 없다. 또한 글을 쓰고 고치려고 하면, 칼로 나무껍질을 베어내면 된다. 목간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글자를 연습하기에 좋았다. 한번 사용한 종이는 뒷면을 다시 사용했고, 다 사용한 종이는 버리지 않고, 포장재 등으로 계속 사용할 만큼 종이는 귀하고 값이 비쌌다.

종이 사용이 크게 늘어난 계기로 7세기 후반 삼국통일 전쟁을 치르면서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에게 불교가 널리 퍼진 것을 들 수 있다. 스님들만이 불경을 읽었던 것이 아니라, 신도들도 불경을 읽고자 하는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많은 경전이 필요했다. 내용이 많은 불경을 언제까지나 베껴서 보급할 수는 없는 터. 결국 신라는 목판 인쇄술을 발전시켜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6호. 8세기 중엽)을 탄생시켰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인쇄물의 수요가 성장하고, 그에 따른 종이 공급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신라에서 종이를 만든 기술자紙作人로 전하는 황진지黃珍知의 관등은 내마柰麻로 17관등 가운데 11위였다. 그는 5두품 출신의 전문 기술자로 어엿한 중급 관리였다.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는 기술자가 만든 신라의 종이는 닥나무 껍질을 두드려서 만든 하얗고 반질반질한 종이라는 뜻으로 백추지白_紙, 또는 계림지鷄林紙라 불리며 당나라와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당시 신라는 동아시아 바다를 무대로 활발한 해외교역을 하고 있었다. 불경의 수요와 수출로 인해 신라의 제지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의 주요 수출품인 고려지
신라의 종이 제작 기술을 이어받은 고려는 종이의 수출을 더욱 확대했다.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에 ‘고려의 닥종이는 밝은 빛을 내므로 모두들 좋아하며 이를 일러 백추지白錘紙라 한다.’고 했다. 고려의 종이는 송나라에서 견지繭紙 즉 누에고치로 만든 것이라고 잘못 알려질 만큼, 비단같이 치밀하면서도 매끄러웠다. 고려의 종이에 글씨를 쓰면 먹이 진하게 배어 아주 좋으며, 색깔 하얗기가 명주와 같고, 질기기는 비단과 같은 중국에는 없는 기이한 물품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청자지靑磁紙, 취지翠紙, 두터운 견지繭紙 등 다양한 종이가 송宋, 금金, 일본 등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청자지는 광택이 있고 좀을 먹지 않아 귀중한 책을 필사할 때 많이 사용되었는데, 금나라 장종(1168~1208)이 청자지를 애용했다고 한다. 1221년 고려에 온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는 고려에 종이 10만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무리한 물품 요구 때문에 고려와 몽골의 외교 마찰이 일어났지만, 몽골이 종이 10만장을 요구한 것은 고려 종이의 우수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종 23년(1145년)과 명종 16년(1186년)에는 전국에 닥나무를 재배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고려는 종이 만드는 것을 적극 장려했던 것이다. 종이 만드는 장인은 공조서供造署에 배치되어 있었고, 종이를 만드는 생산처인 지소紙所도 운영되었다. 고려는 958년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에 능통한 자들을 관리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교 경전이나 문장을 공부하는 자들이 크게 늘어나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 또한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불경에 대한 수요도 더욱 커졌다. 책의 수요가 늘어난 만큼 종이 공급이 늘어야만 했다. 종이 생산이 활발해지자 종이 가격도 많이 내렸다. 덕분에 고려는 좋은 책을 많이 갖고 있어 송나라에서 고려에 서적을 요청할 정도였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발명되는 등 고려의 인쇄문화가 발전한 바탕에는 한지가 있었던 것이다.

종이 생산이 더욱 크게 늘어난 조선
조선은 학문을 장려하는 나라였다. 15세기는 조선의 새로운 정치적 이념인 성리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시기였기에, 국가에서 많은 간행물을 만들어내던 시기였다. 너무 많은 책을 펴내고 종이 공급이 못 따라갈 지경에 이르자, 정부는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 재배를 백성에게 권장하고, 원료 부족을 해결하고 품종 개량을 위해 일본에서 닥나무를 들여와 재배를 시험하기도 했다. 또 중국과 일본의 종이 만드는 기술을 도입하여 조선의 제지술 개량을 시도하기도 했다. 1415년 종이를 만드는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여 200여 명의 기술자를 배치시켰다. 전국에는 약 700명 정도의 기술자가 있었다. 많은 서적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제지업을 장려했던 것이다. 특히 닥나무 재배에 유리한 전라도 등 남부 지역에서 종이 생산이 많이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는 200여 종이 넘는 다양한 종이가 생산되었다.

정성을 들여 만든 한지
한지는 다른 나라 종이와 원료와 제조법이 달랐다. 11월경에 1년생 닥나무를 베어내어 커다란 솥에 넣고 삶는다. 그 다음 겉껍질을 벗기고 물에 불린 다음 적당한 길이로 잘라 솥에 넣고 잿물에 삶는다. 다시 흐르는 냇물에 담가두어 잿물을 씻어내고, 햇볕을 쬐어 탈색을 시킨다. 표백된 닥을 건져내어 물기를 짜내고 방망이로 여러 번 쳐서 뭉친 섬유다발을 풀어준 후, 통에 넣어 물을 붓고 잘 저어 주고 돗자리 등으로 종이뜨기를 한다. 발을 천장에 줄 하나로 매달고 물질을 전후좌우로 하는 외발뜨기를 하면 종이가 고르게 된다. 압착하고, 말리고, 두드리는 과정 등을 거쳐 종이조직이 치밀하고 강도와 광택도가 높은 종이를 완성한다. 종이는 99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용하는 사람이 100번째로 만진다고 하여 백지百紙라고도 한다. 이렇듯 정성을 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종이는 우수한 품질로 이름이 높았던 것이다. 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Henri Zuber)는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책이 있다.”는 점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외규장각 의궤의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질 좋은 종이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한지의 미래, 빛나는 가능성
한지는 이제 다만 서예와 회화를 위한 매체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장판지와 벽지, 창호지는 한옥에 사용되는 건축 내장재로 쓰였고, 생활용구를 만드는 공예재료로 다양한 색감과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한지가 사용된다. 한지의 미래는 그것만의 장점을 살려내어 그에 맞게 현대화, 대중화하면서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한지로 만든 생활용품이다. 종이로만 인식되어 왔던 기존의 관념을 탈피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선보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될 만큼 대중화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개발품을 통해 우리는 한지의 미래를 본다. 의상, 양말, 넥타이, 스카프 등 다양한 상품이 개발되었는데, 세탁이 될 정도로 기존의 생각을 탈피했다. 우리의 한지는 오랜 수명과 변치 않는 색을 자랑한다. 옛날 서적을 영구보존할 때 한지만큼 좋은 재료가 없었다. 한지의 오랜 보존성과 독특한 질감 등의 장점을 살려 고급 인쇄용지나 자동차 배터리 절연지 등의 특수 분야를 기대해볼 수 있으며, 창의적인 디자인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의 한지는 1600년 동안 이어져왔다. 그리고 지금, 한지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화두, 새로운 가능성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고집스런 자부심을 살리면서, 또 다른 도약을 위해 조화로운 어울림의 지혜를 더욱 발휘할 때다.

글•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사진•문화재청, 한지개발원, 연합콘텐츠

출처:문화재청